[기고] 우석영 님께서 보내주신 칼럼입니다.


2011년은 식품 환경 발자국 표기 원년의 해


우석영 (하모니아 공동 발행인)


  최초의 인류라는 호모 하빌리스가 탄생한 것은 약 260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것은 약 20만년 전이다. 최초에 말이 있었다 하나, 언어가 탄생된 것은 약 4만년 전이다.  최초엔 빅뱅이 있었거나 아니면 최초란 건 아예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나? 한가지는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 생존이 우리의 문화적 생존에 앞선다는 것이다. 오직 전자를 기초로 하여 후자가 만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더 고매하게 생물학적 생존을 할 것이냐, 하는 고민에 대한 대답의 총체가 바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생물학적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물론 물, 공기, 식품, 이 셋이다. 아직까지 안전한 공기는 일단 차치하자. 모든 곳에 식수가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은 지형학상 물 공급이 원활해온 곳이니, 일단 물도 괄호에 넣을 수 있다고 보자. 문제는 우리가 먹을 거리라고 부르는 식품 (혹은 식료품)이다. 

  왜 식품이 문제인가? 오늘날 ‘식품을 먹는다’는 것은 1610년이나 1815년에서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당시엔 식품의 생산, 가공, 보존, 수송에 지금만큼 막대한 에너지가 소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식품과 관련된 제 1의 문제는 오히려 식품 생산량 유지였다. 하지만 오늘날은 식품의 문제는 단지 농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늘 에너지 문제와 연동된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어떻게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곧 ‘어떻게 어느 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느냐’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아직까지 화석 연료 기반 에너지다.

  만일 이 화석 연료 기반 에너지 생산이 환경적인 차원에서 아무러한 문제가 없는 것이라면, 식품과 에너지와의 함수 관계 역시 전연 문제 삼을 것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바로 이러한 방식의 에너지 생산이 ‘기후 오염’물질을 생산하고 있다고, 그리하여 지구 생태 시스템을 파괴하고 있다는 과학 보고서를 접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의 양식 자체가 지구 환경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지구 생태 시스템을 파괴하고 있다는 발견은 새로운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제는 상식이 된 ‘환경 발자국 (탄소 발자국)’이 그것이다. 현재 산업화된 세계에서의 식품 생산-소비 체제는 엄청난 환경 발자국을 찍는 에너지의 생산- 소모를 통해서만 지탱되고 있기에,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저 1610년이나 1815년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가 어떤 식품을 선택해서 먹느냐, 하는 문제는 곧 우리가 얼마나 환경적으로 책임지는 삶을 사느냐, 하는 문제와 완전히 똑 같은 문제가 된다.  1610년, 1815년에 식사가 오직 생물학적이며 문화적인 (생존의) 선택이었다면, 오늘날 식사는 생물학적이며 문화적이며 동시에 생태적인 (생존의) 선택이 된 것이다. 오늘날 어떤 식품의 선택은 곧 이 세 가지 차원에서의 동시 선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이러한 앎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소비자)는 식품을 선택할 때 환경적으로 책임을 지는 태도로 선택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건지 알지를 못한다. 이것의 근본 원인은 필자가 보기엔 ‘무지’ 탓인데, 이 ‘무지’는 일변 강제된 것이요, 일변 자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 강제성은 이 소비자의 ‘무지’ 상태야말로 자신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근본 인자가 되는 일련의 식품 기업체들, 에너지 기업체들로부터 온다. 어떤 식품이 어떻게 생산, 가공, 보존, 수송되는지, 그 과정이 과연 윤리적인지, 그 과정에서 얼마만한 환경적 비용이 소요되는지, 소비자들이 알게 되는 사태를 그들이 달가워할 리는 만무하다. 우리의 무지야말로 그들의 기쁨의 원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소비자들의 ‘무지’는 어느 만치는 자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특히 맛에 탐닉하는, 가난의 기억(생물학적 생존의 당위성)을 무의식 속에 간직한 한국인들에게 그러하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식사는 저 삼중의 선택이 아니요, 오직 이중의 선택일 뿐인데, 이것은 ‘역사의 상처’와 관련된 일종의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 자발성과 (위에서 말한) 강제성의 결혼 혹은 공모가 오늘날 나날이 엄청난 환경 발자국을 찍어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언젠가는 옥죄리라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따라서 하나의 식품 생산, 가공, 보존, 수송의 환경적 비용인 식품의 환경 발자국은, 소비자로부터의 강력한 요구 없이도, 그 환경적 위험성을 자각한 정부에 의해서 모든 소매점에 진열되는 상품에 일괄 표기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시에 함께’ 깨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그런데 비단 당위만은 아니다. 이것은 지금 현실이 되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의 식품 환경 발자국 레이블링(labelling) 은 2011년에 호주에서 처음으로 시작될 예정인 것이다. 또 호주 내 몇몇 대형 슈퍼마켓들 역시 식품의 환경 발자국 표기를 2011년부터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인 테스코Tesco 역시 최근 푸드 마일(food miles)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여러 요소들 중 오직 식품 수송의 환경 비용을 모든 식품에 표시하겠다는 결정이다. 영국의 마켓 앤 스펜서Market &Spencer 역시 비행기로 운반되어 온 상품에 적절한 표기를 할 예정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일례로 자이언트 기업인 월마트Walmart는 ‘이코-레이블(eco-labels)’을 그 생산품에 2011년 안에 붙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2011년의 혁명이요, 식품 환경 발자국 표기 혁명이다. 혁명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혁명의 서막이다. 물론 우리 소비자들이 이러한 표기에 대해서 둔감한 반응을 보인다면, 이것은 혁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잔혹하게 도살되는 돼지를 바로 눈 앞에 두고서 향미 빼어난 돼지고기를 기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에 없다. 식품에 표시될 환경 발자국의 수치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잔혹하게 도살되는 돼지가 아니라 그저 ‘종이 위 숫자’일 뿐이겠지만, 만일 우리가 생태학적 상상력을 충분히 키워갈 수 있다면, 그 숫자를 통하여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인지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연결성에 대한 앎이야말로 생태적으로 기쁜 선택을, 그리하여 참으로 기쁜 식사를, 참으로 기쁜 삶을 이끌어내는 근본 인자일 것이다.

  한국은 어떠한가? 호주, 영국, 미국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은 비단 정부나 기업(슈퍼마켓)의 단독적인 결행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학계의 관심과 요구, 소비자들의 관심, 소비자들의 요구, 대중이라 불리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요구가 먼저 바탕 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에서 필자는 정부가 ‘먼저’ 나설 필요가 있다고 했지만, 기실 대중이 관심하지 않는 바에 관심하는 정치인과 정당은 없다는 점에서, 대중의 요구 역시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한국엔 대중의 관심도 미약하고, 정부 역시 역사 역 주행을 하느라 분주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사태가 정녕 이러하다면, 이러한 정황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소비자로서, 책임을 아는 존엄한 한 인격체로서 우리 스스로 깨어나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관심사와 요구를 떠 안아 현실정치로 전화할 힘이 있는 정치 세력을 요청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다.

2010. 6. 22
글 / 우석영 (하모니아 공동 발행인)


2010/06/29 15:29 2010/06/29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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