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삶과 농민문화 외 (1983)

공동체적 삶

한국가톨릭농민회 소식지(1983. 4)

 

서로 돕고, 위하며, 나누는 삶

우리는 흔히 “사람이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은 쉽게 하면서도 그 말뜻을 깊이 생각하거나 그 말뜻에 맞는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사람이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이 말은 곧 아무도 혼자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람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삶의 도리를 가리키는 말이요, 나아가 모든 것은 서로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나와 관계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나와 우주 자연, 삼라만상이 서로 연결되어 한몸(일체一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같은 자녀로서 한 형제자매임을 알려주고 사람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 길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그러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조직형태를 공동체라 하고, 함께 사는 삶의 형태를 공동체적 삶이라 한다면, 공동체적 삶이란 곧 서로 돕고, 서로를 위하여, 서로를 함께 나누는 삶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요, 세상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면 우리가 서로를 돕고 위하는 이 삶의 자세가 사림이 살아가야 할 본연의 도리요, 참된 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공동체적 삶의 한 예를 우리는 초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떡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사도행전 2.44 ~ 46 즉 공동체적 삶이란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나눔으로써 인간의 삶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인간의 본래의 품위에 알맞게 이루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실은 서로 돕고 나누며 함께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만 살겠다는 이기와 이해관계의 다툼 속에서 서로를 갈라놓고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인간을 수단과 대상으로 취급하기를 서슴지 않는 실정에 놓여 있다. 사람을 받들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물질의 소유정도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구조 속에서 경쟁과 소유에 의해서 비인간화되는 불행이 태연히 저질러지고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권력과 금력을 소유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우리 농민들은 부당하게 억압당하거나 고통당하고 천시당하며 소외당하고 있다. 서로 노려보는 세상은 차갑고, 서로 빼앗는 세상은 빼앗길까 걱정스러우며 서로를 짓밟고 죽이기까지 하는 세상은 두렵고 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도 알게 모르게 물질숭배의 노예로 비인간화되어, 함께 나누는 공동체는 무너지고 이웃이 멀어지고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 오늘날 독점자본과 제도적 폭력 속에서 가진바 없는 우리 영세농민들이 경쟁과 소유의 논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과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참으로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반성하고 결단해야 할 때이다. 인류의 전체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치닫는 오늘의 문명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삶이 경쟁을 통하여 돈과 재물을 얻고 입신출세하여 지위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하여 인생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는 삶의 형태로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즐겁고 신나는, 사는 의미와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돈과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는, 갈라놓고 다투는 삶이 아니라, 하나 되어 가진 바를 나누고, 서로를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사람, 참 농민으로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바탕은 사랑과 협동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이르시는 절대과제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곧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다투지 말고, 비인간화되지 말고, 참사람으로서 “함께 살아라”라는 것이요,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 가진 바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 나누며, 함께 산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기본 바탕은 바로 이 사랑이다. 협동은 사랑의 실천형태로, 서로의 힘을 모아 함께 일함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협동의 의미는 단순히 힘을 크게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혼자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함께 함으로써 “가능하게 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협동의 기적은 함께 나눔에 있다. 서로를 함께 나누는 것, 가진 능력이나 재산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기쁨까지 함께 나눔으로써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은 서로 나눌수록 적어지고, 기쁨과 즐거움은 함께 나눌수록 커진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도울 때만 참된 의미에서 살아날 수가,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공동체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형태이다.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체적 삶이란 이념이나 단순히 이상(理想)이거나 뜬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농민의 -나아가 인류 전체의- 고통과 질곡을 해결하는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인 삶의 형태로 되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 삶을 통해서 구조악을 극복하고, 그 삶의 실천형태인 협동화를 통해 경제적 곤란을 해결할 수가 있다. 따라서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체 삶의 실천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정리하여 우리의 삶을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곧 공동체의 건설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을 사이좋고 즐거운 마음, 일과 놀이가 하나 되어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정이 흐르는 마을로 만드는 일이며, 공동체의 삶이란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 존중하며, 서로가 가진 바를 나누고 함께 힘을 합하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다. 참으로 우리가 서로를 믿고 서로가 자기를 온전히 열 때, 그 친교를 토대로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서로가 가진 바를 나눌 때 정이, 사랑이 넘치고 물질이 넘친다. 이 공동체적 삶의 실천이 우리의 과제이고 실천목표이다. 우리 모두가 참사람, 참 농민으로 공동체 삶의 실천을 위해 함께 일하자!

 

 

 

가톨릭 농민 운동의 오늘과 내일

정호경 신부

 

가톨릭 농민운동

가톨릭농민운동. “운동”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진력하는 것”이지요. 운동은 살아 움직이는“생명”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운동은 “출발”과 “과정”과 “목표”가 있게 마련이에요. 다시 말해서 “어디서”“어떻게”“어디로” 가는 거지요. 먼저 우리 운동의 출발점(“어디서”)은 병든 농촌, 병든 농민입니다. 갖가지 구조악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농촌사회의 농민이 심한 병을 앓고 있어요. 그렇다면 마땅히 농촌과 농민의 병이 치유되어야지요. 그래야만 이 땅의 농민이 해방되고 구원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농촌과 농민이 치유되고 해방되는 길은 없는가? 우리의 현실과 우리자신을 냉철히 살펴보면, 참으로 암담하고 절망적인 느낌마저 들 때가 많아요. 과연 우리의 농촌과 농민에게 희망이 있는가? 저는 우리 농민운동의 16년 역사를 돌아보면서 큰 희망을 갖습니다. 이 희망의 길은 제 혼자만의 생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바로 여러 농민형제들이 살아온 길이자, 절망 속에서 희망을 몸소 살고 보여주신 예수의 길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길은 “믿음운동”입니다. 우리운동의 과정(“어떻게”)은 바로 “믿음운동”이지요. 농민 “스스로” 하느님의 모습임을 깨닫고 깨어나면서 이웃과 겨레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이웃과 함께 생각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길이지요. 스스로 깨어나 함께 모여 삶의 굿판을 벌리는 것입니다. 우리 운동과정의 바탕은 “스스로” 그리고 “함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운동의 목표(“어디로”)는 무엇입니까? 우리 운동이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모든 이가 하나 되는 잔치자리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여러 농민형제들이 소망해온 길이자 인류의 구원자 예수가 소망하고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이지요. 배운 사람 못배운 사람, 가진 사람 못가진 사람, 힘센 사람 약한 사람, 남자 여자의 차별이 없는 모두가 하나 되는 사랑의 잔치상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 이것이 바로 우리운동이 가는 방향이자 목표입니다.

이상, 우리운동의 출발과 과정과 방향 및 목표를 간단히 확인했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는 우리운동이 “어떻게”(과정) 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운동의 출발점(어디서)과 목표(어디로)는 분명히 옳았습니다. 문제는 과정이지요. “어떻게” 잔치의 길을 가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운동과제입니다.

 

대결과 건설의 길

우리운동이 “어떻게” 가야합니까? 여러분들이 부족하나마 살아 온 길이요 예수가 사신 길입니다. 그것은 “싸움”의 길이자 “건설”의 길입니다. 농민을 병들게 하는 세상의 죄를 없애는 싸움이자, 인간다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악의 세력과의 대결과 하느님나라 건설, 이 길은 누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는 길이며,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길입니다. 믿음의 길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운동과정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대결과 건설, 이 둘이 떨어져서는 안되지요. 서로 보충하면서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결은 소홀히 하면서 건설이 될 수 없고, 대결만 고집해서는 건설이 이루어질 수 없지요. 그렇다면 “무엇과 대결(싸움)해야 하느냐?” “무엇을 건설해야 하느냐?” 이게 문제지요. 농민을, 인간을 병들게 하고 멸망케 하는 구조악과 -세상의죄- 대결해야 하고 인간다운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 건설해야 하지요. 여러분들이 금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고자 세우신 계획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조악과의 대결을 위해 “농촌사회를 민주화”하면서 인간다운 공동체 건설을 위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자”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실상 구조악을 없애기 위한 정의구현운동만 갖고는 안되지요. 싸움 역시 공동체적 삶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이념극복도 불가능하며, 현대물질문명의 거센 급류를 이겨낼 수가 없어요. 이상 두 가지 활동이 함께 이루어져야 인간을 병들게 하고 멸망케 하는 온갖 잡귀를 몰아내면서 참 잔치 하느님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농민과 경제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운동이 악의 세력과의 대결을 어떻게 해왔고, 또 그 한계는 무엇인가를 대충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경제문제를 보지요. 땅문제 – 일하는 농민들이 땅을 잃어가고 있고(소작료 46.4%), 무엇보다도 농약, 화학비료 등으로 땅이 죽어가고 있어요. 가격문제 – 저(低)농산물 가격정책, 외곡도입정책등으로 이 땅의 농민들은 거듭된 좌절로 희망을 잃고 있어요. 억울한 거래문제 – 농산물은 똥값인데 공산품은 금값이지요. 비료의 경우 외국농민에 비해 87%나 비싼 사료를 사 쓰고 있어요. 억울한 세금문제 – 도시근로자의 면세액 정도의 소득인 경우, 농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50여 만원의 세금을 내야하지요. 증산문제 – 거의 대부분의 농민들이 증산이 곧 폐농임을 체험했지요. 더군다나 증산기적이라는 녹색혁명의 내막은 독점세력 특히 다국적기업의 지속적 횡포를 뜻하는 거예요. 1943년, 1957년, 멕시코와 필리핀에 설립된 신품종개량연구소(미국 록펠러재단, 포드재단)에서 공급되는 품종은 계열회사에서 파는 농약, 비료 등을 4-5배 이상 써야만 증수된다는 겁니다. 우리농촌은 날이 갈수록 증산함정에 빠져 농약, 화학비료 등의 노예시장으로 전락하고 땅까지 죽게 만들었지요. 이상 경제문제를 보더라도 문제의 뿌리는 농민을 병들게 하고 비인간화시키는 정책이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나라 안팎의 독점세력, 특히 다국적기업과 관련되어 있어요. 우리처럼 외국의존도가 80%가 넘는 나라에서는 그 피해가 막심하지요. 

 

현대 물질문명의 문제

또한 더 깊이 파고들면, 결국 현대물질문명, 현대소비문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요. 최대의 생산, 최대의 이익, 최대의 소비, 최강의 지배, 최고의 편리, 극단적 이기주의, 이게 가장 큰 문제예요.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수 천 만년에 걸쳐 축적된 자연자원을 수 십년 안에 다 캐내어 써버리겠다는 심보는 무엇을 뜻합니까? 개발, 발전이라는 허울로 제욕심만 차리자는 심보는 세상을 온통 망쳐 놓자는 만행이지요. 머지않아 겪게 될 자원고갈도 문제지만, 다 캐내어 태워버림으로써 뿜는 독가스(공해)는 땅과 자연을 죽이고 급기야 인간의 생명까지 해치고 있지 않습니까? 실상 경제적인 면에서도 농민은 도시를 꿈꾸고, 도시인은 선진세계를 꿈꾸고 있지요. 농민은 도시사람처럼 살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어요. 사실이지 현대물질문명에 앞장선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예요. 미쳐서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 그런데 이른바 개발도상국 사람들은 그들을 못 따라가 안달을 하는 꼴이지요.

우리는 꾸준히 농민을 병들게 하는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 농민회에서 잘못된 정책을 개선하기 위해 생산비 보장운동, 조합민주화운동 등 잘못된 정책 바로잡기운동을 해 왔어요. 그러나 그것만 갖고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농민의 마음 안에 독점세력의 유령, 현대물질문명의 우상이 있는 한 싸움이 안되지요. 싸움의 한계지요.

또한 우리나라 농민들이 모두 뭉쳐 싸운다 해도, 독점세력, 현대물질문명의 힘을 이길 수 없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더 차원을 높여서 이기는 길을 적극적으로 찾아야해요. 그 길이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는 길이지요.

옛날 우리 농민들이 비록 고된 삶이었으나 저녁식탁은 잔치였지요. 하루 동안의 얘기, 이웃의 얘기, 비록 영양가가 높진 못했으나 자연식품으로 정을 담은 음식이 있었어요. 또 정초가 되면 우리의 공동체놀이인 대동놀이가 있었어요. 거기에는 솔직한 삶이 있었고, 이웃이 있었고, 나눔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조금 살기 좋아졌다는 농민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식탁은 깨어졌습니다. 텔레비전과 조미료와 각종 가공식품 등으로 식탁잔치는 사라졌어요. 가정도 마을공동체도 깨어졌어요. 농민은 서로 경쟁자로 갈라져 있습니다. 조금 더 편해져서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 우리 농민 역시 독약을 먹고 있는 셈이지요. 81.9%의 농민들이 농약중독 경험이 있어요. (매일경제 82.12.4.). 우리 스스로 땅을 죽이고 있어요. 자연은 거짓을 모르니까 심은 대로 내는 법이지요. 사람이 땅을 못살게 굴면 땅은 반드시 복수를 하게 됩니다.

공포의 무기경쟁을 보세요. 지금 세계가 갖고 있는 무기는 이 지구를 여덟 번 이상 멸망시키고도 남는다고 해요. 어디 지구뿐이겠어요. 우주까지 침범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평화를 위해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병들었으면 이 흉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세 살 난 애기에게 물어보세요. 가공할 무기경쟁이 평화와 무슨 관계인가? ……사실 이 세계를 주무르는 사람은 몇 백명 안쪽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확실히 미쳐 있어요.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뛰고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고분고분 따라주니까 그러는 거예요. 따라주는 사람들이 줄어지거나 없어보세요. 그때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겠지요.

사람이 산다는 게 도대체 뭡니까? 편리해지면 행복하던가요? 남을 마구부리면 행복하던가요? 사실 사람구실 못하는 독점세력들은 농민을 보다 더 불안할지도 모릅니다. 행복은 함께 사는데서 나오지요. 갈라지면 불행하지요. 더군다나 수많은 민중들을 갈라놓는 독점세력들은 쫒기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레 겁을 먹고 무리한 짓을 자꾸 하게 되지요.

우리가 경제의 노예가 되거나 경제적 이익 만에 집착하면 결국 같이 망할 수밖에 없어요. 이 모든 장애를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해요. 이것이 공동체적 삶이지요.

 

농민과 정치

정치문제를 봅시다. 사람은 함께 살아야 제대로 산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확인합니다. 함께 살자란, 서로의 거짓없는 목소리가 어울려 스스로의 문제를 생각하고 해결하는 행동이 요구됩니다. 이게 정치지요. 정치의 요체는 자치(自治)지요. 즉 정치란 스스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정치를 외면하는 것은 현실과 이웃을 외면하는 이기주의이지요. 더군다나 정치가 독점된 사회에서는, 정치가 사람을 무더기로 병들게 하고 죽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 농민은 자치의 힘이 거세당해 있어요. 왜 그럴까요? 몇 가지 큰 이유가 있지요. 첫째 냉전의식병, 둘째 자치경험부족, 셋째 언론의 횡포입니다.

냉전의식병은 사람을 갈라놓는 가장 심각한 병이에요. 그 증상은 개인의 분열, 사회의 분열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심이지요. 형편에 따라 아부하기도 하고, 잔인한 폭군이 되기도 합니다. 참되고 옳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저혼자 살아남기 위해 처신하는 안보주의에요. 피지배자 안에도 피해유령과 가해유령이 공존하여 갈라져 있고, 지배자 안에도 마찬가지에요. 줄곧 당하고 살아온 농민들이 자식을 통해 부리는 자의 꿈을 이루려는 욕심이나,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잔인한 폭군행세를 하는 것도 냉전의식병 때문이에요. 이른바 지배자들도 자기보다 더 강한 자에게는 아부하고,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는 폭군행세를 해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지배의 역사부터 문제가 시작되었어요. 소수의 지배자가 일하는 민중을 부리면서부터 ,더 쉽게 더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극단적 흑백논리, 극단적 선악관을 강요했어요. 지배자는 가상적인 적을 구체화시켜 양자택일을 강요함으로써, 끊임없는 긴장감과 적대감을 조장해 왔어요. 찬성은 모두 옳고 반대는 모두 그르다는 식의 흑백논리가 강요되어 왔어요.

제2차 세계대전 – 이것도 소수 독점세력들의 이해싸움이었지요. – 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을 일방적으로 갈라 놓았어요.

물론 이해 때문이지요. 여기에 제 안보만 노리던 민족내의 소수 앞잡이들이 미?소의 힘에 가담함으로써 철전지 한(恨)인 분단의 장벽은 결정적으로 굳어지기 시작했어요. 6.25전후로 양민 대학살을 겪은 마을이 어디 한두 마을입니까? 이 땅에 이른바 “사상싸움”-이건 애당초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요. – 으로 피해를 안 본 가정과 마을이 얼마나 될까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습니까? 낮에는 이쪽에 붙어야 살고 밤에는 저쪽에 붙어야 살 수 있었던 뼈아픈 체험을 겪어야 했던 우리 백성들에게는 냉전의식병이 골수에까지 박혀 있어요. 그래서 우리농민들은 극단적인 흑백논리의 꼭두각시행세를 해대며, 때로는 굽실거리고 때로는 잔인한 폭군행세를 하고 있어요. 만일 농민이 이 병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올바른 관계도 구원도 불가능하지요. 실상 이 냉전의식병의 뿌리도 나라 안팎의 독점세력에 연루되어 있으며, 현대물질문명과 관련되어 있어요.

농민의 자치적 힘을 거세하는 둘째 셋째 원인은 자치경험을 막아온 제도 및 체제의 대변자인 언론의 횡포입니다. 이것 역시 독점세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요. 특히 언론의 경우 전세계 정보의 90%이상을 주무르고 있는 세력은 무서운 다국적기업인 5대통신사(미국2, 영국1, 프랑스1, 소련1)래요. 특히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정보는 누가 어떤 맘으로 다루느냐에 따라,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 되기도 하며, 겨레를 배신하는 짓이 겨레에 대한 사랑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애국애족이 반역이 되기도 하며, 양민학살이 애국으로 둔갑하기도 하지요. 최근 새교회법에 대한 언론보도를 봐도 그래요. 신부, 수녀가 정치의 도구 -이를테면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이법의원, 조합간부 등 – 가 되지 말자는 얘기를, 정치참여금지 – 근로자, 농민의 삶 등 현실을 외면하라는 뜻의 – 라고 떠들어 댔어요. 하여튼 농민의 자치경험을 가로막는 장애나 언론의 횡포 역시 독점세력의 횡포문제지요.

 

농민과 문화

또한 지배문화, 외래문화, 소비문화 등의 횡포로 농민문화는 압살당했어요. 농민의 자기 말, 얘기 춤, 노래, 놀이가 사라졌어요. 뽕짝이나 팝송, 서양춤, 서양말, 관료적 말이 판을 치고, 농민은 문화의 주체가 아닌 대상물, 관객, 만만한 소비자로 전락했어요. 온통 갈라놓는 상품문화, 개인주의 문화가 설치고 있어요. 이 같은 현상 역시 농민을 갈라놓고 병들게 하는 무서운 세상의 죄이지요. 이것들 역시 현대물질문명, 독점세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요. 따지고 보면 걱정만 해서, 소리만 질러서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며 사람답게 사는 길은 없는가? 있어요.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공동체적 삶”을 사는 길밖에 없어요. 독점세력과 현대물질문명을 이기며,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 삶은“믿음공동체”를 건설하는 삶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 생명살리기 운동입니다.

 

믿음공동체의 건설

이 과제가 제대로 해결되기 위해서 우선 생각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농촌, 농민문제를 따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농촌, 농민문제가 바로 도시, 도시인 문제이고, 그 해결 또한 한 믿음 안에서 도시공동체와 함께 추진되어야 합니다. 농촌의 마을 신앙공동체와 도시의 작은 신앙공동체가 만나, 서로의 삶을 나누고, 걱정을 나누며, 공동과제를 함께 풀어나가야 합니다. 이해를 극복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룩하기 위해, 구체적인 현장공동체를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운동이 해온 마을협동운동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도시공동체와 함께 삶의 문제, 건강문제 독점세력문제, 현대물질문명문제를 극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시공동체와 함께 자연식품으로 마련한 정이 넘치는 식탁을 마련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도시공동체와 함께 온갖 정치공해, 언론공해를 극복하며 우리의 문화, 우리의 삶을 회복하고 창조해 가야 합니다. 도시공동체와 함께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죽이는 온갖 잡귀를 몰아내며, 참믿음과 나눔의 공동체를 건설해가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 되는 잔치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한 의미도 바로 이것입니다. 믿음을 향해 하느님나라에 이르는 구원의 길입니다.

이 같은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공해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기 시작하고 있고,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인가? 회의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어요. 편리하고 분주하고 부유한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대 경제불황이 이점을 생각하도록 해주고 있어요. 도시인들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자라고 있고, 교회 역시 대규모 군중사목이 참사목이 아니라는 각성과 함께, 작은 믿음공동체운동의 절실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이 같은 조짐들은 분명 인간다운 공동체 건설에 좋은 못자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같은 공동체가 건설, 확장되어간다면, 현대물질문명의 거센 물결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바벨탑을 쌓는 독점세력도 그 힘이 약화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진정 맑고 뜨거운 맘으로 믿음공동체운동을 해나간다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갈 것이라 믿습니다. 또 큰 희망을 갖습니다. 보다 맑고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조급하지 않고 차분한 자세로 새 공동체 조성에 소중한 새 출발이 되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주역이 되길 기대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감사합니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제14차 전국 대의원총회에서 한 특강 내용을 요약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