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환경과 함께 진화합니다. 생명은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진화해 나갑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진화의 조건인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그 창출된 환경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나간다는 것입니다. 얀치는 <자기를 조직하는 우주>에서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구 탄생의 순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명 진화의 사건을 ‘공진화’라는 관점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을 줄기로 삼고 있는 기존의 과학에서는 환경이라는 고정된 틀에 생명이 일방적으로 적응해 가는 과정을 진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동적이고 단면적인 생명 이해와 달리 얀치는 생명의 특성을 ‘자기 조직화’로 규정하면서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 문화의 진화도 ‘자기조직화’라는 생명 진화의 연장선장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최한기는 이미 『기학』이란 책에서 “諸曜運轉, 自成機括, 즉 세계는 스스로 운행질서를 이룬다”고 하여, ‘자기조직화’를 우주의 기본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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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핵심 개념을 들라면, 단연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지극한 낮춤을 통해 생명을 모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모신다는 말만 가지고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기에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는 이 “시천주”의 “모실 시(侍)”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다셨습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모신다는 것은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일어나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임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어느 누구도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이라는 것은 곧 이해가 되는데, 문제는 “내유신령, 외유기화”란 말입니다. <안으로는 신령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가 일어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신령과 기화라는 말의 해석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화라는 말은 조선시대의 주자학에서 나온 개념이 분명한 데 반해, 신령이란 말은 주자학과는 전혀 무관한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신령이란 말을 수운 선생이 기독교로부터 가져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내유신령, 외유기화”란 말은 마치 기독교의 개념과 주자학의 개념을 조합한 말이 되고 맙니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자학은 내세를 인정치 않습니다. 당연히 영혼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에 견주어 기독교는 기화라는 개념을 인정치 않습니다. 따라서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개념을 서로 대립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두 종교에서 취해온 개념으로 볼 경우 해석은 불가능해지고 맙니다.
하지만 수운 선생께서 동학을 창도하실 때 “내유신령, 외유기화”란 말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이 말이 있음으로 해서 동학이 성립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동학의 핵심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수운 선생께서 말하고자 하셨던 이 말의 본뜻은 무엇이었을까요?
김지하 시인은 이 말을 떼이야르 샤르댕의 진화론 개념을 가지고 푸십니다. 물질이 진화하는 동안 의식 또한 관계성, 순환성, 복잡성을 띄면서 진화해간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동학을 푸는 가장 뚜렷하고 진전된 시각으로 여겨져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원불교의 소태산 선생께서도 <물질이 개화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도 김지하 시인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셨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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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부이며 고고학자였던 떼이야르 샤르댕은, 자기조직화의 진화과정은 분화, 복잡화와 함께 의식의 확장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물질이나 생명의 복잡화가 진행될수록 우주 진화의 내면에서 감각(感覺)이나 의식(意識)이나 정신(精神), 영성(靈性)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즉, 음양, 인간과 환경, 남여, 전체와 개인의 분화는 의식의 확대와 함께 진행됩니다. 또한 한편에서는 분화의 과정에서 군집화(群集化), 전체화(全體化)가 이루어지지만 한편에서는 개별화(個別化)하여 종내는 각각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얀치의 생명 이해, 인간 이해는 인간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통한 새로운 문화 형성, 생명의 문화 형성의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여기에 비춰 생각하면, 객관적인 조건만으로 사회운동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계급적 이해의 틀 속에서 기존 사회운동의 주체로 부각되었던 민중이라는 개념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면을 강조하는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씨’이나 ‘생각하는 백성’이 생명세계를 더 적확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운동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개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처럼 각비(覺非, 각성, 깨달음)와 (자연 혹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운동의 주체가 형성된다고 여깁니다.
‘다차원적인 자기 조직화의 그물’이 지금까지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생명 세계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진화를 통한 생명의 성화(聖化)가 인간 진화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며, 생명운동의 목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시천주에 대한 해설은 서정록 선생님의 글에서 따왔습니다. 서정록 선생님은 샤르댕의 진화론이 의식의 진화론이 되어 인간 중심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합니다. 진화의 정점에 있다는 인간들이 오히려 물질에 더욱 속박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또한 시천주를 인내천으로 변형시킨 천도교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별도로 논의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공진화에 대한 이야기는 얀치의 <자기 조직하는 우주>(1989, 범양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