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은 지켜보고, 발견하는 것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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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다양한 방면으로 독특한 디자이너들이 있다. 그 중 특히 한국 젊은이들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디자이너는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인 나가오카 겐메이(長岡賢明)이다. 그는 화려하지 않지만 쓸모 있는 제품, 그리고 오래 쓸 수 있는 상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다.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갖고 있지만 물건을 직접 디자인하여 만들지 않는다. 새로움을 보여주기보다는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소비자에게 알려주는 디자인 철학을 갖고 있기에 많은 이들이 그의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맨 왼측에 있는 이가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이다. (출처: http://www.d-department.com/jp)
새로운 물건보다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자
그가 만든 D&Department라는 회사는 다양한 일을 한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상품에 대해서 “얼마나 새롭게 물건을 만드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까”를 젊은 시절부터 고민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물건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 좋은 제품을 만드는 사람을 찾는 일에 더 주력한다. 그리곤 이 과정에서 얻은 이야기를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준다. 단순히 상품 앞에 사진 몇 장으로 생산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생산자가 어떤 가치로 물건을 만들고 있는지를 조근조근 알려준다. 그래서 상품을 판매하는 샵(shop)을 운영하는 동시에 지역 잡지도 만들고 있다.
가고시마 시내, 백화점 마루야가든즈에 위치한 D&Department 샵 (출처: 김이경)
일본 도쿄, 오사카, 가고시마 등 7개의 지점에서 D&Department의 작업을 직접 볼 수 있다. 또한 서울 이태원에도 D&Department 샵이 생겼을 만큼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D&Department와 나가오카 겐메이의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금 촌스럽지만) 꽤 세련된 디자인의 물건만은 아니다. 관심 갖고 살펴볼 부분은 그것을 찾아내는 그들의 관점이다.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
초기에는 중고 제품을 판매하는 샵을 열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물건뿐 아니라 가치를 새롭게 재탄생시킬 수 있는 독특한 샵을 구상하게 된다. 급격한 산업화와 대량생산은 쓰고 버리는 상품을 무분별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을 그저 돈 주고 산 뒤 쓰고 버리면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예전에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도 오랫동안 사용해도 질리지 않고,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이 용도별로 찾아보면 한 가지씩은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바탕해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을 가진 물건을 일본 곳곳에서 찾아내 상점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2000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D&Department에서 찾아낸 가리모쿠사의 쇼파와 의자 (출처: 김이경)
상품이 매장 선반에 올라가기까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친다. D&Department에서는 선정 기준인 ‘롱 라이프 디자인’, 즉 유행보다는 오랫동안 사용해도 지속적으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진 물건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D&Department 상점의 물건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확 와 닿는다. 그들은 직접 생산현장을 방문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물건이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생산자는 언제까지 이 물건을 만들 것인지 등 생산의 전반적인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 유행에 치중하는 상품을 만들다보면 물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고쳐 쓸 수 없는 단절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이 물건을 직접 써 본 후 검증된 제품만 진열대에 올라갈 수 있다.
무엇보다 독특한건 그들의 판매 전략이다. 보통 상점은 소비 심리를 활용한 마케팅 기법을 적용해 더 많은 소비를 이뤄지게끔 디자인한다. 그런데 D&Department는 반대다. 샵에 오는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지 않도록 배치한다. 또한 특정 물건을 부각시키거나 판매를 촉진시키는 진열을 하지 않도록 인테리어를 한다.
상품과 생산자, 그리고 판매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다
나가오카 겐메이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실무를 익혔다. 그러는 중에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기보다 독자적인 디자인 영역을 구축했다.
“고졸인 나에게는 큰 학력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대기업에도 취직할 수 없고 대학교수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흥미를 가져 줍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부럽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아무리 큰 기업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그것은 ‘이런 일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강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획서를 써도, 아무리 자금이 있어도, ‘해보고 싶다’라는 강한 마음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학력이 별로인 나는 바로 거기에 승부를 걸고 있습니다.” – <디자이너, 생각위를 걷다> 中
학계의 정형화된 배움을 얻지 않은 까닭인지 그의 작업은 말랑말랑하고 지역, 사람, 기업 등 다양한 분야와의 결합이 쉽게 이루어진다.
그 중 하나가 <d design travel> 잡지다. 처음에는 D&Department의 활동과 디자인에 관한 내용을 담았는데, D&Department 샵이 지역 곳곳에 열리는 점에 착안해 디자인을 기반한 여행 잡지로 컨셉을 바꾸었다.
D&Department에서 발행하는 지역과 디자인을 컨셉으로 한 잡지 <d design travel> 표지
(출처: http://www.d-department.com/jp)
<d design travel> 잡지의 첫 페이지를 살펴보면 어떤 가치를 갖고 잡지를 만드는지 잘 알 수 있다.
– 우리가 비용을 들여 구입해서 사용한 후 추천하겠습니다.
실제로 숙소에서 며칠 동안 잠을 자고, 직접 식당에서 밥을 먹고, 상품을 구매해 사용한 후 추천하겠습니다.
– 우리가 가지 않은 곳은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더불어 최대한 경험을 솔직하게 쓰겠습니다.
– 롱 라이프 디자인의 컨셉에 맞춰서 선정하겠습니다.
– 특별한 렌즈를 사용해 사진의 질을 높이지 않겠습니다.
– 우리가 방문한 장소와 사람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겠습니다.
잡지의 한 페이지. 물건, 상점, 레스토랑 등을 소개할 때 상점 주인, 생산자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출처: http://www.d-department.com/jp)
가고시마 샵. 계산대 앞에 <d design travel>이 비치되어 있다. (출처: 김이경)
<d design travel>은 일본 47개 현을 모두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분기별로 발행되고 있다. 지역과 사람을 중시하기에 그들의 상점은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된다. 샵에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 NPO 등 시민단체와 연대해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지역에서 열리는 환경 관련 축제에 대한 홍보를 샵에서 대대적으로 열기도 하고, 지역 만담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가고시마 샵의 경우 위치한 마루야가든즈라는 백화점이 지역, 시민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입점한 지역 예술가, 활동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D&Department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앞으로 물건을 살 때에 ‘누구에게 샀는가’에 중점을 두어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듭 지역에 대해 강조한다. 지역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을 한다면 그곳의 개성과 매력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영토와 인구가 많은 일본에서는 그것이 더 다양할 것이다. 또한 대를 이은 상점이 많고 상품 디자인에 신경을 더욱 쓰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도 ‘이건 일본에서만 가능한 거야’라고 치부한다면 장시간 일하고, 더 소비하는 삶을 쳇바퀴 돌 듯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대기업에 잠식당한 산업에서 질 좋은 상품,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드는 생산자는 더 이상 찾기 어려울지 모른다. 소비를 다르게 보기, 이것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정리: 김이경 (모심과살림연구소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