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의 시대와 협동조합이라는 방주(方舟)

파국의 시대와 협동조합이라는 방주(方舟)

 

글 하승우(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모심과살림연구소 초빙연구원)

 

 

 

삶이 위태롭다. 생태위기와 전쟁, 경제위기, 금융위기, 해고와 실업, 에너지 위기와 핵발전소, 식량위기, 자살 등 곳곳에서 위기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금껏 살아남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런 위기에도 계속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는 챔피언?

 

허나 지금까지의 생존이 앞으로의 삶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순수한 경쟁과 자유시장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얘기이다. 현실에서는 적대적인 경쟁이 인수합병이라는 말로 상대방을 잡아먹고, 소수의 독점기업들이 소유권의 정당한 행사라며 시장을 통제한다. 공정사회, 기회균등을 부르짖지만 사실상 한국사회는 두 개의 질서로, 즉 특권을 남용하는 소수의 기득권층과 제대로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민들로 나뉘어져 있다. 인사청문회에서 보이듯 그들에겐 부동산투기가 상식이고 직위를 남용한 특혜가 권리이다. 재벌가의 후손들에겐 불법증여나 분식회계가 상식이고 특별사면이 권리이다. 그래서 무엇이 잘못인지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사회에서 각종 위기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멘토나 힐링같은 임시방편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내 삶도 위태롭지만 네 살 먹은 우리 아이의 삶은 더 위태롭다. 이대로라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갑작스레 좋아질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육아와 관련된 이런저런 책들도 들춰보는데, 맘에 드는 책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과 관련된 책들은 하나같이 ‘미래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이렇게 먹이고 키우면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된단다. 허나 사람의 삶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계산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당장 내일도 예측할 수 없는데 미래라니.

 

안타깝지만 과거의 지혜가 미래로 이어졌던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미래만 바라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지금을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미래가 존재할 수 있나? 지금의 불행을 견디기 어려운데 어떻게 나중에 행복이 올 수 있나?

 

물론 인간은 어느 정도의 고통을 참으며 견딜 수 있고, 그 고통을 통해 행복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고통과 달리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사회적 조건은 그런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가령 핵발전소는 계속 고장을 일으키고 있는데, 정부는 핵발전소를 더 짓겠단다. 이것이 참고 견뎌야 할 고통의 문제인가? 경제규모는 커지는데 노동과 생활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개인이 참고 버텨야 할 문제인가? TV를 켤 때마다 쏟아지는 오디션과 성공담들, 정말 개인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실패한 건가?

 

그리고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못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대안일 듯싶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증명되었듯이 바닷물을 쏟아 붓는 것 외엔 뜨거워진 원자로를 다룰 대안이 없다. 새로운 경제를 떠들지만 대형마트나 프랜차이즈 가게를 뺀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를 논하지만 아파트 난간에 오르거나 스스로 목을 매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 관계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더 이상 미래를 얘기하지 않으리라, 불확실한 미래에 현재의 잠재력을 맡기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너는 참지 말고 지금 하고 싶은 걸 맘껏 누려라. 그러면서 네 미래는 네가 스스로 선택하고 살아가며 결정해라. 다만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미래를 ‘지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마. 혼자 살아남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마. 힘겨운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이를 악물며 되뇌는 나의 주문이다.

 

그렇게 미래를 함께 살아가는 방법들 중 핵심이 협동운동이다. 협동운동의 힘은 미래를 위해 서로 도와야한다는 당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협동운동의 힘은 먼저 기꺼이 타자에게 손을 내미는 내 속의 에너지이다. 힘들 때 손 내밀 수 있는 관계, 당장 해줄 건 없어도 기꺼이 손잡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관계, 오늘 하루를 더 버티게 해주는 관계야말로 협동운동의 중심축이다. 그래서 협동운동은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드러난 다른 사람들을 마주볼 때에만 강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협동은 내가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음을 자각하는 과정이고, 협동조합은 그렇게 자각한 사람들이 서로를 떠받치는 장이다.

 

그런데 현실의 협동운동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제는 진지하게 던져야 한다. 어떤 당위나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우리의 생존을 위해. 성경에 나오는 노아는 자신이 살기 위해 방주를 만들었지만 자기 가족만 태우지 않고 지구상에 다시 생명을 꽃피울 다양한 생명들을 태웠다. 그렇다면 지금의 협동운동들은 그런 방주이고자 하는가? 다양한 뭇 생명들이 협동운동을 통해 새 삶을 준비하고 있는가?

 

 

* 한살림고양파주 소식지 "햇살한줌 바람한줌" 2013년 5월호에서 옮겨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