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한’이란 말로 집약해서 표현해 왔습니다. 김상일 교수 같은 분은 이 ‘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면,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한’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한’은 ‘하나’를 의미하는데, 여기에도 서로 상반되는 두 의미가 겹쳐 있습니다. 즉,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체로서의 하나’를 동시에 가리킵니다. ‘크다’는 의미와 ‘작은’ 개개의 것, 하나밖에 안 되는 것과 여럿을 한꺼번에 담는 많은 것이라는 모순된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이 말은 다른 언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원심적 확산’과 가운데로 모여지는 ‘구심적 수렴’을 동시에 뜻합니다. 즉, ‘한’은 자율, 자치, 독립, 능동성을 갖고 있는 개체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하나의 체계를 가지는 전일적(全一的)인 전체로 엮어냅니다. (한국사상은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여러 요소들의 하나로의 통합, 내지는 하나인 전체의 개체적 분리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양과 태극의 역설적 관계를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사상은 개인과 전체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사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운동은 사회의 전체적 체계를 결정하는 구조나 체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이나 그 개인의 일상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개인이나 일상은 구조나 체제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구조나 체제의 변화만 가능하다면, 개인이나 일상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의 운동(생명운동)에서는 개인이나 일상의 변화가 구조나 체제의 변화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이나 일상의 변화와 실천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구조나 체제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것이죠.
‘한’ 사상은 고조선 이후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으로 면면이 그 맥락을 이어 왔습니다.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유, 불, 선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최치원의 풍류도에서부터 고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 근세의 동학, 그리고 한, 삶, 멋을 강조하는 유동식 교수의 기독교신학에 이르기까지 ‘한’ 사상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뒷받침해 주는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산업문명이 확산되고, 개체와 전체를 나누어 어느 한 곳에 귀속시키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이 대립하면서 ‘한’의 세계가 왜곡되고 우리 삶이 병들어 갔던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고 자연과 인간이, 개체와 전체가 유기적으로 생명의 세계를 엮어가는 우리 삶의 본모습, ‘한’의 세계를 새롭게 형성하기 위해 생명운동으로서의 ‘한’ 살림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 김상일, <한사상>, 온누리, 1990. <한철학>, 온누리, 1995
–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연세대출판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