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는 무엇으로 지속하는가?
-가을걷이 한마당에서 생각해보는 ‘순수증여’의 의미
최근 고추 때문에 한살림 매장이 뒤숭숭했습니다. 주문을 취소하기도 하고 아예 주문 사실을 부인(?)하는 조합원도 있었다고 합니다. 올해 한살림 고추값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올해 시중 고추값이 너무 싸다는 것이지요. 올해 공급되는 한살림 고추는 근당 21,000원쯤 됩니다만, 시중 고추가격은 절반 이하입니다. 작년과 비교하면 완전히 뒤바뀐 상황입니다. 작년에는 고추가 흉작이어서 국산 고추 자체가 귀한 데다 가격도 천정부지로 올라 한살림 유기농 고추와 시중 관행 고추 사이에 가격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한살림생산자들은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반대현상이 생겨난 것입니다. 풍작으로 시중에 고추가 넘쳐나면서 조합원들이 한살림 고추 이용을 꺼린다는 것입니다. 작년엔 없어서 문제, 올해는 남아서 문제입니다. 그래도 10월 10일 현재 전반적으로 애초 약정량의 70% 정도는 주문이 이루졌다고 합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한살림의 저력이 느껴집니다. 오늘의 주제, “공동체는 무엇으로 지속하는가?”에 대한 답은 이미 소비자들의 고추 책임소비 안에 대부분 들어 있습니다. 이번 달에 각 지역별로 펼쳐지는 가을걷이 행사에 가서 생산자를 만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고추파동(?)과 가을걷이잔치 한마당
그렇습니다. 지속가능한 한살림의 시스템적 비결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약정(約定)’입니다. 그런데 약정의 바탕에는 공생의 철학과 상호 신뢰가 깔려 있으며, 그 철학과 신뢰를 몸으로 확인케 하는 자리가 가을걷이잔치 한마당인 것입니다. 가을걷이 한마당을 통해 생산자들의 수고에 감사하고, 고추를 비롯해 이러저러한 파동(?)으로 인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불편함도 털어내면서 서로서로가 정말 ‘한살림’이라는 것을 확인해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전인 1989년 11월, 한살림 ‘생산-소비자 가족잔치’가 열렸습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이라는 글귀가 쓰여진 깃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의 이순로 이사장님과 한살림생산자공동체협의회 김영원 회장님이 소비자와 생산자를 대표하여 맞절을 올립니다. 그 당시 한겨레신문에 제법 크게 보도가 되었습니다만, 맞절하는 두 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해 1989년 6월 11일에는 충북 음성군 성미마을에서 첫 번째 단오잔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단오와 가을걷이, 생산자와 소비자는 이렇게 일 년에 두 번 ‘하나됨’을 확인합니다. 특별히 가을걷이마당이 중요합니다. 가을걷이란 말 그대로 ‘가을에 여문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추수감사제’라고도 하고 ‘가을걷이잔치’라고도 했습니다. 추수(秋收)가 곧 ‘가을걷이’를 의미하니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입니다. 공식적으로 ‘가을걷이’ 행사가 시작된 것이 1992년이니까 올해로 22번째가 됩니다.
가을걷이 행사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날입니다. 생명의 먹을거리를 정성을 들여 가꾸어 공급해준 생산자에게 감사하고, 시장의 고추가격이 떨어지거나 사과가 좀 못 생겼어도 약속을 지키는 소비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맞절이 상징하듯이 생산자와 소비자는 한 가족입니다.
그렇습니다. 호혜와 신뢰에 기반한 ‘생산-소비 협동’은 한살림공동체의 지속성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협동운동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습니다. 사고파는 관계가 아닌 주고받는 관계, 즉 증여와 답례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양식과 새로운 사회경제질서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가을걷이잔치 한마당은 생산-소비 호혜시스템과 공동체정신(한살림마음)을 축제로 승화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산-소비 협동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속된 말로 2%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왜 가을걷이잔치를 ‘추수감사제’라고 부를까? 왜 “천지신명” 운운하는 고천문을 읽어야 할까? 무대 앞에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 휘장이 걸려 있을까?
요컨대, 한살림 생산-소비 협동공동체의 기초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호혜 관계와 신뢰에 기초한 계획생산-책임소비의 약정에 있습니다만, 거기에 더해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이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답례는 옆으로 하는 것.”
무위당의 ‘공동체의 성공 조건’
언젠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께서 공동체의 성공 비결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비결’이라니 귀가 솔깃해집니다. 사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나 지속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위당의 행적과 말씀을 모아놓은 어느 책에서는 그 비결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깃발을 너무 앞세우지 마라. 둘째 공(功)을 남에게 넘겨라.”가 그것입니다.
깃발 이야기는 이해가 갈 것 같습니다. ‘이념을 앞세우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요즘 말로 하면 자기주장만 내세우지 마라는 의미로도 읽혀집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공(功)을 남에게 넘겨라.” 아마 이 말씀을 하실 즈음, 주변에서 공로를 다투는 일이 눈에 띠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답례는 말이지. 이렇게 꼭 앞으로 하지 않고 뒤나 옆으로 해도 돼. 누군가에게 뭘 줄 때 줬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아예 받을 생각을 말아…”
역시 공을 내세우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른손으로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런데 무위당의 ‘옆이나 뒤로 하는 답례’는 도덕규범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호혜는 둘 사이 쌍방향의 1차원적 주고받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옆이나 뒤로 하는 답례’를 통해 증여와 답례, 즉 호혜적 관계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옆으로 퍼져나갑니다. 호혜의 그물이 만들어집니다. 호혜의 순환, 명실상부 호혜의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괜찮아. 나한테 돌려주지 말고 필요한 사람에게 줘~” 합리성의 잣대로 보면, 공을 넘기는 것도 답례를 옆으로 돌리는 것도, 받을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것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공동체는 이럴 때에만 지속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계산법과 상벌만으로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무위당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조건 없는 증여’, 즉 ‘순수증여’가 그것입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주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그걸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잖아요?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품되 아무데서도 바라는 게 없지요?”
무주상보시라는 말은 불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무위당의 말대로 ‘조건 없는 베풂’을 말합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불가를 빌어서 이야기했지만, 모심의 생명사상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답례를 바라지 않는 베풂’이야말로 진정한 ‘모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심에 조건을 달면 거래가 됩니다. 물론 거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모심’을 말하기에는 좀 부끄럽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증여와 답례를 통해 사고파는 관계를 넘어서려 했습니다만, 이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미 거기까지 갔습니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순수증여의 마음이 그것입니다. 그 안에 공동체 나머지 2%가 숨어있습니다(사실은 200%이지만). 경제인류학에서 말하는 증여와 답례, 생산자와 소비자의 호혜적 관계는 이제 ‘순수증여’의 차원으로 깊어집니다. 추수감사제의 속뜻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농업과 자연의 순수증여
얼마를 주었는지, 누구한테 주었는지, 언제 돌려받을지를 생각하지 않는 ‘그냥 주기’가 순수증여, 즉 무주상보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런 존재의 품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짐작이 될 것입니다. 바로 ‘자연’입니다.
1998년 <한살림가을걷이잔치한마당> 초대장에 이런 문구가 써있습니다. “자연생태계 질서에 따르는 생산과 생활양식의 대안을 확인하는 자리.” 좀 어렵기도 하고 순수증여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그 뜻하는 바는 짐작이 갑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무주상보시’에 대한 깨달음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생태적 삶의 실천이 그것입니다.
10월의 누런 들녘은 풍요롭습니다.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자연에게, 천지신명에게 정말 고개를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볍씨 한 알’이 ‘벼 한 포기’가 되면 대체로 낱알 2천개가 생산됩니다. 엄청난 뻥튀기(?) 입니다. 어렵지 않은 계산입니다. 품종에 따라 차이가 적지 않습니다만, 한 포기에 벼이삭 20개가 붙고 벼이삭 당 평균 낱알 수가 100개라면 2천 알이 됩니다. 벼뿐만이 아닙니다. 한 알의 씨앗에서 수천수만 배로 폭증하여 생산되는 밀, 콩, 옥수수, 감자 등등.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농업 이전 농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논물도 대고 피도 뽑는 등 적지 않은 노동이 필요하지만, 농민들의 수고에 비해 자연이 주는 혜택은 정말 기적에 가깝습니다. 도시텃밭에서 체험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매달린 방울토마토를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상품농업, 돈벌이농업 시대의 농업경영자(?)에게는 이런 감사의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을걷이 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입니다. 종자, 농약, 비료에, 비닐하우스 자재에다 트랙터, 콤바인 등 농기계의 원리금까지… 가을걷이는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납니다. 풍작이든 흉작이든 계의치도 않습니다. 가격과 수익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돈벌이농업에서는 흉작이라도 가격만 좋으면 상관이 없으니까요. ‘매출-비용=수익’, 답이 정확히 나옵니다. 모든 게 돈입니다. 수천수만 배로 폭발한 자연생태계의 기적은 돈벌이 앞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할 것은 자본이며, 자신의 생산기술이며, 적기 출하와 판로개척의 노하우라고 생각합니다.
돈벌이농업에서 하늘은 원망의 대상이 될지언정 감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농업과 자본주의 농업의 차이점입니다. 원래 농업은 자연의 순수증여에 의존하였습니다. 농업은 그나마 인간의 노동이 매개되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만, 자연이 ‘그냥 주는 것’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먹을거리는 물론이거니와, 물과 공기를 생각하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다만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공기(산소)가 없다면 생명은 단 3분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호사가들은 자연생태계가 주는 혜택을 돈으로 계산해 보여주기도 합니다만, 부질없는 일입니다.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핵심 주제는 책임소비가 아닙니다. 추수감사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을걷이 행사의 핵심은 ‘추수감사제’에 있습니다. 물과 바람과 햇볕에 대한 감사, 자연에 대한 감사, 천지신명에 대한 감사가 그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농사짓는 일이 순수증여에 가장 가깝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순수증여,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비밀
다시 무위당 선생님이 말씀하신 공동체 유지의 숨겨진 비밀을 쫓아가 봅니다. 옆으로 답례와 무주상보시가 그것입니다. 매매관계 아래 신뢰에 기반한 증여와 답례, 그리고 그 아래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순수증여가 있기 때문에 공동체가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이름 없는 조합원 및 생산자 회원들의 기다림과 조건 없는 베풂, 혹은 봉사와 헌신이 있었기에 한살림의 생명-협동운동이 지속가능했습니다.
<한살림 생명-협동 공동체의 전체상>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경제논리에 기반한 거래, 매매관계는 빙산의 위에 드러난 모습입니다. 가끔 무임승차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숨겨진 부분, 즉 신뢰에 기반한 호혜적 관계가 없으면 공동체는 유지할 수 없습니다. 올해 당장 손해가 되더라도 기다릴 줄 아는 소비자와 생산자가 없으면 정교한 물류시스템도 무용지물입니다. 한살림매장에서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고파는 매매관계의 이면에는 호혜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순수증여, “모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실”입니다. 공동체가 유지되는 숨은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100을 주고 100을 받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얌체같은 사람, 이기적인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메워주는 존재가 없으면 조직이 지탱할 수 없습니다. 알고도 손해보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농민생산자일 수도 있고, 이름 없는 조합원이나 활동가일 수 있고, 무위당 선생님을 비롯한 1세대 선배님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자연 지구생태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 것처럼, 순순증여에 대해서는 그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어떤 친구의 소리 소문 없는 도움이나 지나가는 한 마디의 격려도 그렇습니다. 동네 계모임에도 속 깊은 언니나 사람 좋은 아저씨가 꼭 있기 마련입니다. 무임승차가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순수증여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지구생명공동체가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로 순수증여의 여백이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비밀인 것입니다.
보이는 질서와 숨겨진 질서이기도 하고, 지상과 지하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사실 제일 적합한 설명은 음양론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지상 2층: 무임승차.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지상 1층: 합리적인 사람. 더도 덜도 없이 준만큼 받으려는 사람. 자신의 의무도 지키고 권리를 강하게 요구합니다. 물론 의무보다 권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많지만. 일반적인 협동조합은 여기를 중심으로 유지됩니다. 눈에 보이는 조직의 시스템입니다. 양(陽)의 공동체입니다.
-지하1층: 정관에 나오는 권리와 의무는 잘 모르지만, 믿음으로 당장의 손해와 이익을 따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한살림과 같은 공동체는 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유지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땅밑 기둥이 됩니다. 음(陰)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지하 깊은 곳 순수증여.
이는 정확히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구조와도 정확히 대응합니다. 독점자본-자본주의시장경제(돈벌이경제)-호혜주의시장경제(살림살이경제)-순수증여(자연경제)가 그것입니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순수증여의 자연생태계를 약탈하며 공룡처럼 커졌습니다. 자본주의시스템은 물론이거니와 호혜시스템조차도 보이지 않는 순수증여가 있어 작동될 수 있습니다.
(물론 결론은 음양의 역동적 균형입니다. 음은 선하고 양은 나쁜 것이 아니듯 자본주의 시장도, 조직체계나 규칙도 중요합니다. 다만, 잊고 있었던 잘 몰랐던 것을 되살리고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억눌린 ‘음의 경제’의 부활과 ‘음의 경제’와 ‘양의 경제’의 균형.)
모심과 순수증여
‘모심’이란 천지만물 모든 생명을 차별없이 공경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공경하려면 나의 에고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면서 남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나를 비워야 합니다. 그렇게 비우고 또 비우면 내 안에 있는 지극한 하나됨을 만나게 된다고 성인들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면 천지만물이 또한 다르게 보입니다. 모두가 거룩한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심의 첫 마음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면, 모심의 종착점은 순수증여입니다.
순수증여는 모심의 지극한 표현입니다. 답례를 바라지 않는 순수증여는 훗날 더 큰 유무형의 보상을 기대하는 희생과는 구별됩니다. 순수증여의 존재는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순수증여는 깨달음입니다. 모심의 마음입니다. 무위당의 말처럼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다시 말해 ‘그대가 곧 나’라면 주고받고 할 것조차 없습니다. 내 부모와 형제자매라면, 줄 때나 받을 때나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내가 나에게 주는 데 거래를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순수증여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될 수도 없습니다. 지향은 그렇게 하되, 중요한 것은 순수증여의 존재를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몰랐던 것을 아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여기도 감사 저기도 감사, 마음 속 깊이 감사할 일입니다. 협동조합이든, 공동체든, 조직이든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은 바로 이것,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은 한없이 착한 누이들, ‘바보’ 같은 사람들, 공기, 물, 어머니 자연이라는 것을. 그들의 있어 우리가 있다는 것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