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무’라는 자각, 새로운 문명의 씨앗”
강연: 마사키 다카시 (일본 생태평화활동가, 『나비문명』 저자)
통역: 김수향 (카페 수카라 대표)
현재 큰 지진이 구마모토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마모토는 지금까지 지진이 많이 없던 지역입니다. 근 수백 년 동안 이렇게 큰 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올해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에 큰 변동이 생길 것이라는 예감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적으로도 다 일어나고 있는 변화인데요, 저는 그 중심이 일본에 있는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듭니다. 올해 원전을 통해서 일본 경제가 완전히 파탄될 것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6년에 저는 카트만두로 갔습니다. 그때 저는 스무 살이었고. 일본을 떠난 이유는 일본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그 시대의 제 자신도 싫어했습니다.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저의 생각도 주변도 다 싫었고, 이런 사회에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따져보니 저를 만들고 있는 저의 관념, 사상, 저를 이루고 있는 생각들은 모두 일본어로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가 없는 곳에 가보자고 생각하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당시에는 평화로웠던 중동에도 갔고요, 모든 땅을 히치하이크로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카트만두에 도착했습니다. 카트만두는 당시 몇 백 년 전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던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당시 온 세계 젊은이들이 인도나 히말라야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가는 도시였습니다.
“카트만두 포 크리스마스(Kathmandu for Christmas)”라는 말이 퍼지면서 크리스마스면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당시 여행자들이 자주 모였던 식당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매일같이 모여서 먹고 마셨습니다. 세계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한 가지 키워드가 있었습니다. “Too late” 너무 늦었다. 현대문명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아티스트들, 시인, 작가, 화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예리한 센서를 갖고 이 현대문명이 언젠가 끝난다고 예측한 거죠. 제 자신도 일본을 나가려 했을 만큼 싫다고 느낀 그 감각은 그들의 것과 굉장히 흡사했습니다.
그들은 현대문명이라는 열차가 있다면 레일을 따라서 계속 달리다가 벽에 부딪히거나 절벽을 만날 것이라고 감각적으로 생각했습니다. 60년대 그 젊은이들은 현대문명 열차에서 내리고 다른 대항문화(counter culture)를 만들고 대안(alternative)을 만들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사람들은 지구가 무한히 넓다고 생각했습니다.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는 바람에 날려 어딘가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 드신 분은 지금도 그런 분들이 있을 거예요. 일본의 나이 든 정치인들은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능은 바람에 날려서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바로 보여준 것이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사진이었습니다. 70년대 들어서는 경제계나 과학자들이 자본주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는 항상 프론티어가 필요합니다. 프론티어에서 얻고 돈을 벌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그것을 개발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무한정 개발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유한’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아주 망가지기 쉽다, 그렇게 60년대에 감각적으로 그걸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70년대에는 과학자들이 이것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나온 미래 예측이 로마클럽의 보고서입니다. <성장의 한계>. 결론은 아주 쉽습니다. 이 유한의 지구 속에서 무한의 개발은 불가능하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의 파탄이라는 것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경제계에는 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70년대에 비슷한 미래 예측이 6개가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가 2000년에 <지구>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결론은 같습니다. 2000년대부터 자본주의가 기능하기 어려워진다. 이 개발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이 사회 안에 인구를 줄이거나 무언가 다른 방식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보고서 뒤에 자본주의가 방향을 바꿨을까요?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원전을 재가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돈을 위한 것입니다. 정말 미친 세상입니다. 80년대 미국의 과학자들이 미래예측을 내 뒤에는 비슷한 보고서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끝난 겁니다.
그러나 70년 동안 자본주의는 토론을 해왔습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좌파와 우파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시장원리주의, 일명 시카고학파가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것을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향하는 것은 new-world-order, 신세계질서입니다.
큰 나무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봄이 되면 번데기들이 계속 올라와 잎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잎을 다 먹어버리면 이 나무는 죽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먹는 방법을 좀 바꿔야 합니다. 과학적인 미래 예측에서 이대로 똑같이 먹으면 이 나무가 죽어버린다는 것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어떻게 할지가 그때 일어난 논의였습니다.
한쪽에서는 속도를 늦추고 CO2를 줄이고 개발 방식을 바꿔가자고 얘기했습니다. UN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식의 경제 개발을 그만두지 않는다고 했고, 지구온난화 문제는 그 뒤로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지금 그대로 계속 다 잎을 먹어가면서, 계속 커지고 강해지면서 약한 번데기들을 지배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선택. 즉 1%가 99%를 지배하겠다는 방식을 자본주의는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화입니다. 지금 현재 지구상의 1%의 부가 99%의 부보다도 큽니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어딘가에서 반드시 사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원전사고가 일본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금융 거품은 이제 파탄 중에 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가 이야기했었던 이 문명 열차가 이대로 가면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예측, 저는 올해 이 절벽에서 일본이 떨어져가고 있는 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네 개의 큰 섬이 있는데요, 저는 그중에 한국과 가장 가까운 섬인 규슈의 한가운데 구마모토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지진이 일어난 곳이고, 왼쪽 끝에 겐카이 원전이 있습니다. 아래에 센타이 원전이 있습니다. 오른쪽 위에 이카다 원전이 있고, 대체로 다 10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센타이 원전은 작년에 3.11 이후에 처음으로 재가동을 시작한 원전입니다.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는 하나도 해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핵저장고를 뚫고 내려간 방사성 물질은 지금 땅에 닿았고 그 밑으로 내려가면서 수소폭발을 일으키고 다시 지하수를 만들고 폭발을 합니다. 지금도 방사능을 뿜어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후쿠시마 아이들의 갑상선 암이 이미 200명 정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가는 그것이 방사능이, 원전이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센타이 원전을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위쪽 이카다 원전의 운전 허가를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겐카이 원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인간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실제 신은 있을 겁니다. 정말 화를 내고 있을 거예요. 이것은 지구의 1%의 돈의 망자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일본에도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돈의 망자들, 그 힘들이 지금 일본의 헌법을 바꾸고 무기를 팔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마모토에서 이렇게 큰 지진이 일어난 것은 운이 좋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른쪽 위 원전부터 아래쪽까지 지반이 어긋나고 만들어진, 단층들이 지하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 일어나고 있는 지진은 그 단층선을 따라서 일어나고 있는 지진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위에 원전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도 남쪽에 있는 원전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이렇게 일본은 절벽에서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 문명열차는 다 연결되어 있죠. 일본 뒤에 미국, 유럽, 줄줄이 떨어질 겁니다. 하나의 문명이 죽고, 새로운 문명이 태어나는, 그런 문명사의 전환이 되는 큰 변화가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문명을 대신하는 새로운 문명의 비전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말하길, 대체로 하나의 문명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500년 정도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문명이 붕괴되면 그 붕괴의 원인을 해결하는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고 구세주의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나의 문명의 붕괴기에 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는 시기이고요. 오래된 문명이 무엇으로 붕괴하는가. 저의 결론은, 전쟁과 환경 문제입니다.
이것을 서양문명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원전도 지구의 환경 문제입니다. 현대문명은 그것을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하지 않습니다. 1%대 99%가 된 사회에서는 전쟁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도 끝없는 전쟁입니다. 전쟁과 환경 문제로 현대문명이 파괴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새로 탄생하는 문명은 전쟁과 환경 문제를 없애는 문명일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생명평화’입니다.
지금까지의 사회를 조금 수정한다는 의미에서의 생명평화가 아니라, 새로이 탄생하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놀드 토인비와 같은 시대를 산 또 한 명의 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문제를 일으킨 같은 사고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고가 전환될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 문명은 I, 나를 중심으로 사물을 사고합니다.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서양문명적 사고의 기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I, 나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를 끝까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내가 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걸 중심으로 모든 걸 바라보게 됩니다.
이곳이 넓은 바다라고 생각해주세요. 이 바다에는 오른쪽도 왼쪽도 앞도 뒤도 없습니다. 여기에 배가 있다면 이 배에는 바다의 앞이 생기고 뒤가 생깁니다. 배를 중심으로.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과학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뒀을 때 손해인지 이득인지 행복한지 불행한지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이원론에 의해 성립되었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돈을 벌 건지 말 건지. 이때의 ‘나’가 무엇인지 진정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명 한 명을 나무에 달린 사과라고 해봅시다. 훌륭한 선생님들은 얘기합니다. “그런 나를 없애라. 그럼 진실된 내가 보일 것이다.” 그들의 인식 속에는 사과, 이것은 진실된 내가 아니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떨어지면 나무가 벌거벗게 됩니다. 잎, 열매, 꽃은 1년 사이의 생명입니다. 순간의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는 100년, 200년, 1000년도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영혼이라고 이야기해도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 열매에 둘 것인가 나무에 둘 것인가로 나의 사고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이 사과는 나무에서 난 것입니다. 이 열매가 ‘I am tree’라는 의식을 갖고 ‘I’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비이원론이 됩니다. 이러한 의식이 되었을 때 다른 사과 열매까지도 I가 됩니다. 저것도 나고, 이것도 나고, 그럼 누가 누구한테서 얻는 걸까요? 뺏고 상처를 줄 건가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무라는 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상처 줄 일이 없습니다. 그 지식을 아힘사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 나무를 잊고 삽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뿌리뿌리 따로따로입니다. 나무를 잊고 살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를 더 크게 만들려고 합니다. 대립하고 경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절대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나무를 잊고 있기 때문이죠. 나무는 우리의 어머니인데 말이죠.
나는 나무라는 자각, 그것이 생명평화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시아에서는 아주 당연한 생각입니다. 불교의 감각도 그렇습니다. ‘옴’이라고 이야기하죠. 이것은 ‘나무’의 울림입니다. 그리고 하와이의 ‘알로하’는 나무와의 일체감을 기뻐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한국 일본 중국 동아시아는 물론 인도에서 하와이까지 아시아 전체가 공유해왔던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생명평화는 새로운 문명의 씨앗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