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노동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일자리’ 문제는 이제 심각한 사회 현안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핵심 정책과제로 삼아 적극 추진하면서 논란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세대간 갈등 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노동사회연구소의 이주환 연구위원의 기고글을 싣습니다. |
노동시장 구조개혁,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세대갈등론 이면에 가려진 문제의 본질
이주환 (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정부와 여당이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그 핵심은 임금피크제도 확산, 연공급 임금체계 개편, 법제도적 해고 요건 완화 등이다. 정부가 6월17일 발표한 「제1차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안」은 △청·장년 간 상생고용, △원·하청 상생협력, △정규·비정규직 상생촉진, △노동시장 불확실성 해소, △노사파트너십 구축 등 5대 분야 36개 과제를 담고 있다.
하지만 상기 내용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기존 제도를 약간 수정하는 것들이거나, 단기적으로 기금을 지원하겠다는 것들 또는 장기적으로 개편해 가겠다는 이야기들이다. 실업급여 기간 연장 및 지급 수준 상향 등 노동계 요구도 일부 반영돼 있으나 우선순위가 한참 뒤다. 8월31일 언론사 간담회에서 최경환 부총리는 9월10일까지 노사정위원회에서 타협하지 못하면 정부가 “최소한의 지원책”만 담은 개혁안을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노총 등 노동계를 협상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제시했던 ‘당근’을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는 암시다.
임금피크제도 도입과 연공급 임금체계 개편, 법제도적 해고 요건 완화는 지난 20여 년간 재계단체들에서 끊임없이 요구해왔던 사안들이다.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인력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여, 이른바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개선해야 기업하기 좋아진다는 것이다. 지난 8월31일 발표된 「경제5단체 기자회견문」에는 계산 방법이 의심스러운 수치들과 함께 이러한 익숙한 논리가 전개돼 있다.
그런데 재계와 달리 정부는, 노동개혁이 기업들의 효율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 받는 ‘청년들’을 위해서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노동개혁은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라는 것이다. 다소 생소한 주장이다.
전도된 전제에 기초한 정부의 노동개혁안
“경제 재도약을 위해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 이름 붙은 8월6일 대통령 담화문에서 노동개혁 담론은 다음의 두 가지 논리에 근거해 있다.
첫째, 국가경쟁력의 논리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경직”됐다. 경직된 노동시장은 “방만한 공공부문, 비효율적인 교육체계, 금융 보신주의 등”과 함께 대한민국의 성장잠재력을 급속히 저하시켜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뒤쳐지게 하고 있다. “대수술이 불가피”하고, 노동개혁은 그 “첫 번째 과제”라는 것이다.
둘째, 고용절벽의 논리다. 노동개혁의 목표는 “청년들의 절망과 비정규직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들의 절망과 고통은 “고용절벽”을 사이에 두고 청년 비정규직과 대기업 정규직들을 분절시키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비롯된다. 연공임금제도 개편과 법정 해고 요건 완화로 절벽의 가파름을 부드럽게 만들고, 임금피크제도 확산을 통해 언덕 위의 기성세대들이 고통을 분담하게 하여 언덕 아래 청년들이 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노동개혁은 “우리의 딸과 아들을 위해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상의 노동개혁 담론의 논리 전개는 매끄럽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다음의 특정한 전제적 인식들을 암묵적으로 수용했을 때만 그렇다.
첫째, <국가는 시장경쟁에 참여하는 행위자>라는 전제다. 상기 박근혜정부의 노동개혁 담론에서 대한민국은 글로벌 세계시장 경쟁에 참여하는 유기적인 실체이고, 노동, 공공, 교육, 금융 등은 그 유기체 내부의 병든 장기들이다. 이를 수용할 때만이 대한민국이 전신마취와 개복(開腹)을 요하는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노동보호제도는 ‘자연재해’의 원인>이라는 전제다. (고용)“절벽”이라는 은유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따른 피해를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자연질서의 산물로서 인식하도록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담화문에서 고용절벽의 형성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정년연장 의무화”와 “대학졸업자 수 증가”다. 즉, 정년연장법이라는 노동자 보호제도가, 노동시장이라는 자연질서를 교란해, “고용절벽”이라는 재해를 야기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박근혜정부 노동개혁의 전제적 인식들은 논리적으로 전도돼 있고 현실과 괴리돼 있다. 먼저,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가는 시장경쟁의 직접적인 참여자가 아니다. 시장에 참여하는 것은 기업들이다. 정부는 기업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시장경쟁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를 규제할 책임이 있는 행위자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뿌리 깊은, 그리고 이번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된 국가주의 정체성은 이러한 기초적인 역할 구분조차 망각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노동자 보호제도가 오히려 노동자에게 재앙을 야기한다’는 명제는 누가 봐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특정 대상이 대입됐을 때, 예컨대 공공의 적 취급을 받는 ‘대기업 정규직’이 대입됐을 때는 모순이 감정에 가려진다. 그리하여 정년연장 의무화로 발생할 수 있는 일시적인 비용을 임금체계와 고용관계의 구조를 대대적으로 재편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적 비약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박근혜정부 노동개혁 담론의 사실인식과 가치판단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고비용 저효율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노동개혁은 청년실업 개선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부가 진정으로 감정이입하고 있는 것은 장기실업과 고용불안에 고통 받는 청년들이 아니라, 시장경쟁력 강화를 위해 규제완화를 원하는 기업들이다. 노동개혁 담론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청년 일자리”는 ‘저비용 고효율 구조’의 은유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박근혜정부의 노동개혁은 성공할까? 조심스럽지만, 임금체계와 고용구조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이번 노동개혁은 시장의 특별한 시그널 없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년연장 의무화가 대기업에 미치는 효과는 2014~2015년경 대부분 흡수됐다. 아마도 공공부문에서 임금피크제를 강제하는 정도의 변화로 귀결될 것이고, 공공부문 대부분의 기관들은 불만족스럽더라도 노사협상을 통해 적합한 방안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 현재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금 노동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전통적인 용어를 도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청년과 비정규직이라는 약자를 대변하여, 그 반대편에 있는 대기업 정규직의 기득권을 응징하는 주체로서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경쟁에 대한 요구를, 연대의 언어로 포장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생소한 외양을 뒤집어 쓴 낡은 주장들이 사회적으로 점점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취약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의 절망과 고통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누적된 분노와 혐오는 주변 사람들을 향하게 될 것이다. 약자들의 절망과 고통을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동의로 이끌려는 권력의 ‘몰염치’가 지금처럼 공론장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계속 자행된다면, 시장주의자들의 염원이 언젠가 현실화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