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하여
–<한일 시민이 함께 가는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의 성과를 중심으로–
박 맹 수
목 차
1. 인사
2. 지금까지의 발자취 회고
3. 11년간에 걸친 ‘한일교류’ 성과와 그 의의
4. 사회변혁을 꿈꾸는 “운동가에게는 ‘로망’이 없으면 안 된다”
5. 지금은 ‘근대’문명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대
6.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항하여
1. 인사
한국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로 있는 박맹수입니다. 오늘 저는 2006년에 처음 시작하여 작년까지 11회를 맞이한 <한일(韓日) 시민이 함께 가는, 한국의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찾아가는 여행(이하, 한일 동학기행)>에서 거둔 성과를 중심으로 ‘불행했던 과거’를 교훈삼아 ‘바람직한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에 대해 제 생각의 일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일 동학기행’은 일본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로 계시는 ‘일본의 양심’ 나카츠카 아키라(中塚 明) 교수님의 오랜 염원과 도쿄(東京)의 후지국제여행사(富士國際旅行社)의 전면적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나카츠카 교수님과 <한일 동학기행> 이라는 상당히 ‘무거운’ 여행 프로그램을 2006년부터 정식 여행 프로그램으로 추진해 주신 후지국제여행사 관계자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2. 지금까지의 발자취 회고
오늘의 보고가 있기까지, 지난 11년 동안의 발자취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우선 ‘역사적’인 만남에 관한 말씀부터 드리고자 합니다. 1995년 7월에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후루카와강당(古河講堂) 구표본고에서 한국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두개골(頭蓋骨)이 방치된 상태로 1백년 만에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95년 8월 3일자 『마이니치신문』 및『홋카이도신문』 참조) 이에 저는 1997년 4월부터 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홋카이도대학에 유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도교수이신 홋카이도대학의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교수님과 함께 한일 두 나라 공동의 진상규명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1997년 가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때 삿포로시의 어느 ‘야키니쿠점(불고기집)’에서 처음으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카츠카 교수님께서는 그때 ‘홋카이도대학 유골사건’을 둘러싼 한일 공동의 진상조사 활동 -1997년까지는 역사문제를 주제로 한 한일(韓日) 양국의 공동연구 또는 공동조사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의의에 대해 대단히 높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1997년 7월 홋카이도대학 측이 발표한 <최종보고서(유골사건에 관한)>의 일부 내용을 머지않아 간행할 당신의 저서(<역사의 위조를 밝힌다>, 1998년)에서 소개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때가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과 저와의 최초의 만남, 아니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오늘의 이 보고는 바로 1997년 가을의 저와 나카츠카 교수님과의 ‘역사적’만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후 후지국제여행사 이름의 해외여행 프로그램 형태로 <한일 동학기행>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은 나라현(奈良縣) 역사교육자협의회 및 나라현 퇴직교직원회 여러분들이 중심이 된 2002년 여름의 여행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한일 동학기행>은 몇 년 간에 걸친 준비 끝에 2006년에 정기 여행프로그램으로 정착되어 작년까지 11년간 중단 없이 계속되었고, 올 10월에도 어김없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위와 같이, 나카츠카 교수님과 저는 2006년부터 작년까지 만 11년간에 걸쳐 <한일 동학기행>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다양한 교류를 계속해 왔습니다만, 이 동학기행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확히 말하자면 두 나라시민 차원의 ‘풀뿌리 교류’가 점점 더 깊이를 더해 왔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바깥에서 바라보게 되면, 정말로 아주 조촐한 소규모 교류로써 주목할 만한 것이 거의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조촐한 규모의 ‘풀뿌리 교류’를 10년 이상 거듭해오는 가운데 서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느꼈을 뿐 아니라, 평생 잊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행하는 가운데 저희들은 몇 번이고 ‘역사의 진실’ 앞에 마주섬으로써 참으로 가슴 쓰린 순간에 직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예를 들면, 대둔산최후 전투지를 비롯하여 우금치, 보은 종곡 등등) 그러나 그 견디기 어려운 장면에 부딪쳤을 때 일본에서 오신 여러분들께서는 ‘역사의 진실’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일본 측 참가자 여러분들의 협력과 이해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2015 한일시민동학기행, 우금치 전적지에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일본 학계에서는 甲午農民戰爭이라 함)이라는 주제는 근대일본의 한국침략 역사와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주제를 연구해 온 저는 여러분 앞에 섰을 때 ‘역사의 진실(眞實)’과 마주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무엇일까, 또한 여러분들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로 항상 고민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신 분이 바로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이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나카츠카 교수님께서는 1960년대부터 ‘근대일본에 있어 한국(조선) 문제의 중요성’을 남 먼저 인식하시고, 1차 사료에 근거한 뛰어난 연구 성과를 계속해서 발표해 오셨습니다. 1998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역사의 위조를 밝힌다>(한국에서는<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필자의 번역으로 간행되었다)는 교수님의 저서는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반(半) 세기 이상에 걸쳐 나카츠카 교수님께서 지향해 오신 역사연구의 방향을 간단히 요약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말씀드린다면 첫째, 1차 사료에 근거한 연구, 둘째, 역사의 현장(現場)에 직접 가보는 것을 중시하는 연구, 셋째 전체와 부분이라는 두 측면에서 사건이나 사물의 실체에 다가서는 연구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바로 ‘역사의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역사가가 추구해 가야할 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요약하자면,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나카츠카 교수님께서 반 세기 이상의 세월을 바치셨던 연구가 있었기에 저희들의 교류가 있게 되었고, 또한 내실 있는 교류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저희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다시 한 번 나카츠카 교수님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3. 11년간에 걸친 ‘한일교류’의 성과와 그 의의
다음으로, 2006년 이래 정기 여행프로그램이 된 <한일 동학기행>을 통한 저희들의 교류 성과와 그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처음 단계부터 시민 상호간의 교류로 시작했다는 점, 즉 풀뿌리 시민 차원의 교류를 추진해 왔다는 점, 둘째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 의견교환을 통해, 그리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주적(自主的)’이며 ‘자발적(自發的)’인 교류를 해 온 점, 셋째 <한일 동학기행>을 계기로 다양한 형태의 풀뿌리 교류를 만들어 내게 된 사실, 넷째 1회성 행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11년에 걸쳐 일본 측은 한국을 11회나 방문하였고, 한국 측에서도 5회나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풀뿌리 교류를 계속해 온 사실, 다섯째 ‘역사의 진실’ 앞에 진지하게 마주 섬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적 입장을 뛰어넘어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상대방 나라 안에 과거를 교훈삼아 공생과 평화의 미래를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 분들이 대단히 많이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저희들의 풀뿌리 교류는 많은 성과를 내 왔습니다만, 저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처럼 근대일본의 침략 때문에 지금까지도 커다란 상처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인간, 즉 피해자인 저희들의 마음속에 어느 샌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싹 터 오르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나카츠카 교수님께서 번역해 주신 저의 부끄러운 글 「5월 광주가 나에게 남긴 것」(한국어판 <녹색평론> 2006년 5-6월호, 일본어판『미스즈』548호, 2007년 4월호—별지자료 참조) 속에서 고백했듯이, 한국에서는 1980년 5월의 ‘광주사건’ 이래 많은 분들이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강하게 자책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절망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화두들 들고 그 길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 왔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사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 온 고통스런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실패와 관련한 제 경험 한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1987년의 ‘6월 항쟁(민주화운동)’ 과 그 다음 해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설(附設)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 학위 논문을 써야했던 저는 공부보다는 데모를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학원의 어용교수(御用敎授)들에 대한 반대 데모를 조직하였고, 그 다음에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스트라이크를 주도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1995년 까지 약 10년간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없게 되었고, 국립 연구기관에 합격했지만 노동조합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면접시험에서 떨어져 취직도 할 수 없는 고통스런 시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와 관련된 일은 <한겨레신문>에 빈번하게 보도됨으로써, 저는<한겨레신문>의 단골 취재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고통스런 시기에 제 인생 최대의 행운(幸運)이 찾아 왔습니다.
4. 사회변혁을 꿈꾸는 “운동가에게는 ‘로망’이 없어서는 안 된다”
제 인생 중에 가장 쓰라린 시기에 찾아온 최대의 행운이란 다름 아니라 ‘한살림 운동’(1986년 한국 강원도 원주에서부터 시작된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 –별지자료 참조) 제안자이신 장일순(張壹淳, 1928-1994) 선생님과의 만남입니다. 취직도 할 수 없고 박사학위도 취득할 수 없고, 또한 일정한 직업이 없던 저는 1987년경부터 한국 각지를 떠돌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답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강원도 원주에서 처음으로 장일순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장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내유천지 외무소구(內有天地 外無所求)’ 라는 난 1점을 쳐서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선생님께서는 “사회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는 로망(희망)이 없으면 안 되는 법이다. 자신이 꿈꾼 일 가운데 99%가 모두 실패했더라도, 남은 1% 속에 희미한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로망(희망)을 느끼는 사람이라야 진정한 운동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당시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저에 대한 장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한없는 격려가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장일순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힘들고 고통스런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고난의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로망(희망)’ 이라는 말씀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요? 두 말할 것도 없이 ‘목숨(=생명, 일본어로는 ‘いのち=이노치)’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숨(생명)’ 을 지닌 저희들을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희망’ 즉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로망’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일본의 여러분들과 교류를 계속 해 오신 한국의 모든 분들은 일본에서 오신 여러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희망’, 다시 말해 ‘로망’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어떠신가요. 그리고 아마도 이 자리에 참석하고 계신 일본의 시민 여러분들께서도 제가 느꼈던 것과 똑같은 하나의 ‘로망(희망)’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5. 지금은 ‘근대’ 문명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시대
다음으로 <한일 동학기행>을 함께 하는 가운데, 한일 두 나라 시민들이 확인한 것은 무엇이며, 저희들이 배운 것은 무엇이었던가에 대한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격전지였던 우금치, 대둔산, 보은 종곡 등에서 무엇을 확인하였으며,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분명 그곳에는 가해자(加害者)로서 일본군이 저지른 야만적인 살육(殺戮) 행위와 함께, 피해자(被害者)로서의 동학농민군이 비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슬픔에 가득 찬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는 저희들의 동학 여행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얼마 동안은 ‘가해자로서 일본과 피해자로서 한국’ 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처럼 찾아오신 일본인 여러분들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드리는 경우가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고 지금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저의 반성의 핵심은 “왜 나는 일본에서 오선 여러분 앞에 섰을 때 문제의 근원을 보다 깊게 생각하지 못했을까”에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들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近代)’라는 시대 그 자체가 초래한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1860년에 한국의 경상도 경주에서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에 의해 확립된 동학(東學)은 동아시아의 사상자원(思想資源)을 다시 살려냄으로써 서양 ‘근대(近代)’ 문명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문명, 즉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 문명을 창조하려고 했습니다. 동학사상 속에서는 무엇보다도 ‘개벽(開闢)’이라는 용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개벽이란 아주 철저하면서도 근본적인 변혁을 지칭하는 의미로써 첫째 사고방식(세계관)의 개벽, 둘째 삶의 방식의 개벽은 물론이거니와 구극적(究極的)으로는 ‘근대’ 문명 그 자체의 개벽까지를 전망하는 변혁사상입니다.
그렇다면 동학사상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후천개벽’의 새 문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문명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문명”이 아니겠는가 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같은 동학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후천개벽’의 새 문명을 창조하려고 일어섰던 동학농민군들이 철저하게 탄압, 진압되었기 때문입니다. ‘후천개벽’의 새 문명을 지향하며 봉기했던 수백 만 동학농민군을 철저하게 진압한 것은 바로 대량학살의 시대를 열어 제친 ‘근대’ 문명을 남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군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무엇보다도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근대’ 문명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꿔 말하면, ‘근대’ 문명의 개벽을 꿈꾸며 봉기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이라는 아픈 역사로부터 ‘근대’ 라는 시대가 초래한 부정적(否定的) 측면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그러한 부정적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 모색이라는 과제가 저희들에게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한 말씀 덧붙인다면, 홋카이도대학의 이노우에 카츠오 교수님과의 공동연구 및 공동조사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2010년에는 동학농민군을 탄압했던 일본군 독립 후비보병 제 19대대의 대대장이었던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써서 남긴 동학농민혁명 진압 관련 문서를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 현지에서 동학농민군으로부터 입수한 문서 등의 일반 공개라는 획기적인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1997년 7월의 ‘홋카이도대학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사건’ 이래로 무려 14년에 걸쳐 이노우에 교수님을 비롯한 한일 두 나라 연구자들의 끈질긴 추적과 교섭 노력 끝에 성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그 문서는 야마구치현(山口縣) 현립 문서관(文書館)에 기증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야마구치현 현립 문서관의 협조로 한국에서도 2012년 4월 18일부터 그 해 연말까지 관련문서 수십 점이 전시되었습니다.)
미나미 소좌가 수집하고, 그의 아들 및 손자가 오랜 기간 보관해 왔던 온 위 동학문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1998년경이었는데, 그 때부터 해당 문서의 문서관 보존 및 일반 공개가 실현된 2010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온갖 노력을 다하신 분이 바로 홋카이도대학의 이노우에 교수님이십니다. 물론 도 동 문서 보존 및 일반 공개를 위한 교섭 과정에 기회 있을 때마다 참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가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 미나미 소좌의 여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구두 설명) 미나미 소좌만이 아니라, 동학농민군 진압에 가담했던 다른 장교들도 진압 작전이 다 끝난 뒤 귀국 전에 조선 땅에서 자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도 최근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 역시 ‘근대’ 일본의 뒤틀린 역사, 즉 타민족에 대한 침략전쟁이 초래한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6.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하여
2009년 11월, 저는 일본 오사카시(大阪市)에 사무실이 있는 ‘교토포럼’ 초청으로「근대한국의 개벽사상」이라는 주제로 발표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1891년부터 일본 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던 ‘아시오광산 광독사건(足尾鑛山 鑛毒事件)’ 문제로 메이지일본의 ‘문명(文明)’의 본질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싸운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라는,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계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 다나카 쇼조가 조선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에 대하여 대단히 높게 평가한 문장을 남겼다는 사실을 나카츠카 교수님을 비롯한 일본 내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다나카 쇼조의 동학 관련 문장은 물론 1894년 당시의 것은 아니고, 그 2년 뒤인 1896년에 쓴 것입니다만, 저는 그 문장이야말로 대단히 귀중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나 그 직후나 일본에서는 조선의 동학농민군의 행동이나 동학농민혁명 그 자체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에 관해 기록한 1차 사료 내용을 소개합니다.
동도(東道, 東徒가 아닌 東道에 주의 -인용자 주)대장이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였다. “매번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을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싸울 때라도 간절히 그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며, 매번 행진하며 지나 갈 때에도 간절히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물건을 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효제 충신(孝悌忠信)으로 이름난 사람이 사는 동네 10리 안으로는 주둔하지 말 것 이다.” (東道大將下令於各部隊長約束曰 每於對敵之時 兵不血刃而勝者爲首功 雖 不得已戰 切勿傷命爲貴 每於行陣所過之時 孝悌忠信人所居村十里內 勿爲屯住)
12개조 군호(軍號; 紀律—인용자 주)
항복하는 자는 사랑으로 대하라(降者愛對)
곤궁한 자는 구제하라(困者救濟)
탐관은 추방하라(貪官逐之)
따르는 자는 공경, 복종하라(順者敬服)
굶주린 자는 먹이라(飢者饋之)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 짓을)그치도록 하라(姦猾息之)
도망가는 자는 쫓지 말라(走者勿追)
가난한 자는 나누어 주라(貧者賑恤)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하라(不忠除之)
거스르는 자는 잘 타이르라(逆者曉喩)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病者給藥)
불효하는 자는 벌을 주라(不孝刑之)
(「朝鮮國東學黨動靜ニ關スル帝國公使館報告一件』,
日本 外務省 外交史料館所藏, 文書番號 5門3類2項4號)
이상과 같은 동학농민군의 엄격한 규율에 대해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도쿄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등 일본의 일간 신문들도 다투어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동도대장’의 명령 및 동학농민군들의 규율을 보게 되면, 정말로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다시 말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농민군들의 자세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농민군들이 얼마나 ‘도덕적(道德的)’이며, 얼마나 ‘자기규율적(自己規律的)’ 존재인가를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조경달,『이단의 민중반란』, 일본 이와나미서점, 1998, 164-166쪽 참조)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과 거의 똑같은 내용을, 저는 2001년 3월에 일본 치치부(秩父) 답사를 갔을 때, 어느 조그마한 시골 박물관 벽에 걸려 있던 치치부 곤민당(困民黨)의 ‘행동강령’ 속에서 확인하였습니다. 1884년의 치치부 곤민당의 ‘행동강령‘ 역시 규율 엄정한 가운데 사람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1884년의 일본 곤민당과 1894년 조선 동학농민군들이 지향하고 있던 내용 가운데 사람의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했을 때의 감격과 기쁨을 지금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001년 3월의 치치부 답사 당시는 아직 다나카 쇼조라는, 대단한 사상가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9년 11월의 ‘교토포럼’에 참가하여 다나카 쇼조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듯한(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때 일본인들이 쓰는 표현—필자 주)’ 충격과 함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학농민군이 내걸었던 ‘12개조 기율’을 높게 평가한 다나카 쇼조는 메이지일본(明治日本)의 지식인 가운데 동학농민군(또는 동학농민혁명)의 지향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한 유일한 일본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광독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민중들의 목숨이 위태롭던 시기에, 민중의 목숨을 위해 싸웠던 다나카 쇼조가 동학농민군을 높게 평가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고, 어쩔 수 없이 싸울지라도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동학농민군의 ‘자기 규율적“ 모습이 다나카 쇼조의 눈에 바로 들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다나카 쇼조는 1884년(43세)에 이미 토치기현령(栃木県令)의 폭정에 저항하다가 3개월간 감옥에 갇힌 적이 있으며, 1891년에는 중의원(衆議員)의 국회의원 신분으로 ’아시오광산 광독사건‘에 대해 정부 측에 질문서를 제출하고, 국회에서 광독 피해민들의 구제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정부는 피해민들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1897년 3월, 피해민들이 대거 상경하여 정부 측에 직접 청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피해민들은 총 4회에 걸친 상경 청원을 하게 되지만, 1900년 2월 13일의 제 4회 상경청원 운동을 헌병과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함으로써 좌절되게 되었습니다. 피해민들의 청원 운동을 국가폭력을 사용하여 탄압하는 일본정부에 대해, 다나카 쇼조는 <망국에 이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이것(피해민 상경청원 탄압사건–주)이 곧 망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는 질문서>를 제출하여 정부 측의 탄압을 비판하였고, 이듬해 1901년에는 마침내 중의원 의원직을 사직하고, 그해 12월 10일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메이지천황에게 ’아시오광산 광독사건‘ 문제를 직소(直訴)하였습니다. 하지만, 쇼조는 이 직소 때문에 또다시 투옥됩니다. (이 대목에서 고부군수의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위해 두 차례나 청원서를 제출하며 싸웠던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 장군이 떠오릅니다.) 1904년부터 쇼조는 광독 피해가 더욱 극심해진 ’야나카무라(谷中村)‘ 안으로 들어가 피해민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이르렀고, 1913년 작고하기까지 ’야나카무라‘의 주민들과 함께 대정부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이 같은 다나카 쇼조의 투쟁은 바로 바로 목숨=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메이지 일본정부의 잘못된 근대화에 대한 싸움이었습니다. 다나카 쇼조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하게 하지 않으며, 강을 더럽히지 하지 않으며, 마을을 파괴하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 다나카 쇼조는 ’아시오광산 광독사건‘을 계기로 메이지 일본정부가 내걸었던 ’문명개화(文明開化)‘ 정책이 얼마나 많은 산을 황폐하게 했으며, 얼마나 많은 강을 더럽혔으며, 얼마나 많은 마을을 파괴하였고,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는가를 명확하게 꿰뚫어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컨대, 쇼조는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초래하고 있던 잘못된 ’근대‘ 문명에 맞서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한 외롭고 힘든 싸움을 죽을 때까지 계속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같은 싸움의 와중 속에서 쇼조는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 속에 담긴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읽어낼 수 있었다고 봅니다.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간 오로지 ’동학(東學)‘ 연구에 바쳐온 저는 동학농민군의 ’12개 조 기율‘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읽어내고, 그 정신을 높이 평가한 문장을 남긴 다나카 쇼조라는, 대단한 일본인 사상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을, 신(神)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시 몇 십 년간 걸어가야 할 지 모를 길 위에서 저는 다나카 쇼조처럼, 그리고 동학농민군들처럼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해. ’로망(희망)‘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함께 ’싸워 나가고자‘ 합니다. 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7년 2월 18일, 한국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