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심'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주요섭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민주당이 간판을 내렸다. 그리고 새로 올린 간판은 ‘새정치민주연합’. ‘새정치’와 ‘연합’ 사이에 민주라는 말이 겨우 끼어들어간 모양새다. 그런데 약칭으로 불러달라는 ‘새정치연합’엔 ‘민주’가 빠졌다. ‘민주’의 신세가 애처롭다. 해방 이후 60년을 지켜온 민주당의 역사가 사라졌다고 속상해하는 사람도 있고 그나마 이름이라도 건져서 다행이라는 이도 있지만, 2014년 3월 ‘민주’는 분명 ‘계륵’이 되었다.
왜 민주주의는 낡은 것이 되었을까?
한국의 민주주의가 초라하다.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파 인터넷사이트 ‘일간베스트’의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고, ‘민주’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문을 닫았으니 민주주의 그 자체는 몰라도 ‘민주화’와 ‘민주화세력’의 위기는 분명하다. 무엇보다 70-80년대 세대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했던 민주주의의 신화가 사라졌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더 이상 전설이 아니다.
무엇 때문일까? 중동과 터키와 태국에서 민주주의는 치열한 투쟁이고 뜨거운 열망인데 한국에서는 왜 철지난 유행가가 되었을까? 왜 냉소의 대상이 되었을까?
물론 자본과 권력의 횡포 탓이 크다. 악의적인 매도와 공작의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민주주의 자체를 혐오케 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저강도전쟁의 기획도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민심의 변화를 교묘하게 파고 든 것이리라.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 민주화세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통해 투쟁의 보상을 충분히 받은 기득권세력으로 여겨진다. 더 이상 존경심이 있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에게 민주화세력은 그저 기성세대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스스로 다시 묻는다. 왜 민주주의는 낡아보이는 걸까? 왜 민주주의가 흘러간 강물처럼 느껴질까? 혹시, 민주주의가 진짜로 박물관의 유물이 된 것은 아닐까?
무언가가 낡고 늙는다는 것은 ‘오래됐다’는 것이다. 70-80에게는 너무도 생생한 현장이지만, 광주항쟁도 벌써 34년 전 일이다. 분명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판화가 이철수 혜안처럼 묵은 나무에도 꽃은 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꽃이 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치밀하게 분석을 할 수는 없지만 느낌은 있다. 민주주의를 말해도 흥이 나지 않는다. 울림이 없다. 민주주의가 아프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떠올려도 즐겁지 않다. 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더 이상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자기를 내어놓는 것을 볼 수가 없다. 국가정보원의 사이버공작이 심각한 문제이기 하지만, 거기에 목숨을 걸 일은 아닌 듯하다.
요컨대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절실하지 않다. 왜? 아직도 채우지 못한 경제적 부에 대한 욕망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은 진실의 일부일 뿐이다.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다. 2014년 3월 민주주의가 절실하지는 않다. 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단순히 일자리 문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만도 아니다. 나와 우리의 복잡하고 섬세한 마음을 담기에 투표용지의 크기는 너무 작다. 찬성(○)/반대(×) 둘 뿐인 선택지는 차라리 폭력에 가깝다. 정녕 ‘새 정치’가 절실하다.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다.” 미국의 저명한 영성적 사회운동가인 파커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 소개되어 있는 글이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견보다는 관심을 줄 수 있는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요컨대 ‘마음의 민주주의’다. ‘의견(주장, 입장)’보다 ‘관심’이 먼저다. 찬반으로 갈라진 겉마음 아래 정묘한(subtle) 속마음에 귀를 기울이자는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민주주의 심장 치유하기’다. 다시 말해 ‘치유의 민주주의’, 혹은 ‘치유의 정치’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픈 마음, 쓸쓸한 마음, 갈라진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는 정치 말이다.
지난 2월 우리 모두의 가슴을 몹시도 아프게 했던 세 모녀 이야기가 ‘치유의 민주주의’의 절박성을 일깨워준다. 세 모녀 이야기는 ‘권리’와 ‘복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왜 당신들은 당신들의 권리를 찾지 못했느냐’ 라고 나무랄 수 있고, 이른바 ‘세모녀법’을 통해 국가복지적 처방을 제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세모녀의 죽음은 사회적 안전망 이전에 ‘존엄’의 문제다. 왜 그녀들은 마지막 순간에 밀린 월세를 정확히 계산했을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목숨은 하늘만큼 소중하다. 그러나 그 마음, 즉 영혼을 지킬 수 없다면 스스로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 왜 그녀들은 성당과 교회를 찾지 못했을까? 왜 절집의 스님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왜 생명운동 하는 단체를 몰랐을까? 그녀들이 숨죽여 눈물 흘리는 사이, 나는, 우리는, 국가는,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었을까?
마음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라면 민주주의 진정한 출발점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정치적 수사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민심은 집합적 마음이 아니다. 모든 마음을 정당으로 모을 수도 없고, 몇몇 지도자에게 수렴될 수도 없다. 민심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존엄함이다. 이러저러한 욕망더미 속에 숨겨진, 잘 보이지 않지만 오롯하게 살아있는 하나됨의 열망이다.
스스로 다시 묻는다. 왜 민주주의는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을까? 혹시 이념과 교리와 담론은 있으되, ‘깊은 마음’이 없기 때문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민주주의 기초는 자유와 평등이기도 하지만, 생명평화와 생명공동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기초는 박애다. 사랑이고 자비이고 우애다. ‘자유의 민주주의’와 ‘평등의 민주주의’는 ‘박애의 민주주의’의 바탕위에서만 자라날 수 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은 생명세계의 본래 모습을 이해하는 지성적 마음이기도 하고,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감성적 마음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존재의 미세한 떨림을 알아차리는 영성적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영성적으로든 그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마음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