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民)이 연대하는 지역의 사회적경제 (김기섭, 2014.12)

민(民)이 연대하는 지역의 사회적경제

김기섭 (『깨어나라 협동조합』 저자)

 

지난 11월 19일과 20일 이틀간 일본의 협동조합운동가와 연구자 40여 분을 모시고 원주에 다녀왔다. 서울시가 주최하는 국제사회적경제포럼 참석 차 오신 분들이 귀국 전에 꼭 원주를 가봐야겠다고 부탁해왔기 때문이다. 포럼 전날은 마포의 협동운동을 탐방했다고 한다.

 

저녁 늦게 무위당기념관에 도착했으면서도 원주의 협동운동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지역 분들과 교류의 시간도 가졌다. 다음날은 이른 아침부터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원주한살림생협, 갈거리협동조합, 두루바른사회적협동조합 등을 탐방했다. 서울에서 보면 시골 촌구석이지만, 선배들이 밀어주고 후배들이 끌어가면서 기존의 협동조합들이 연대하고, 그 힘으로 특히 노숙자나 장애우를 위한 새로운 협동조합들을 속속 만들어내는 모습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사실 나는 일본 협동조합운동의 대선배들과 내로라하는 연구자들이 어떤 경위로 마포와 원주를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분들이 왜 자비를 털어가며 허고 많은 곳 중에 굳이 마포와 원주를 찾았는지는 안다. 그것은 서울시가 사회적경제의 세계적인 포럼을 개최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사회적 경제 협의체를 구성한 것과는 결이 좀 다른 것이다.

 

사회적경제는 체제의 문제이기 이전에 민(民)의 자유와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고 과정이다. 따라서 사회적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어젠다나 콘텐츠의 선점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회적 경제를 체제나 어젠다나 콘텐츠로 보는 이도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나아가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체제나 어젠다나 콘텐츠를 향해 가는 것은, 사회적경제를 일제강점기 농촌부흥운동이나 개발독재기 새마을운동과 다를 바 없게 만들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적경제는 경제의 저성장과 산업의 구조조정, 이로 인한 실업과 복지의 문제를 기존에 축적해온 협동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자/농민/시민이 주체가 되어 해결하려는 노력, 나아가 자신보다 더 버림받고 더 어려운 사람들을 끌어안으려는 사회적 포섭의 결실이다. 여기에 노동자/농민/시민의 정치 결사체인 정당과 정치가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본연의 임무다.

 

일본의 협동조합운동가들과 학자들은 이런 사회적경제의 주체와 목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급속한 저출산 고령화로 사회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우리보다 훨씬 규모화 되고 발전해 있지만 여전히 각각의 영역 안에 갇혀 있는 협동조합들이 한 인간의 자유와 생존을 향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연대하고, 그 위에 정치 결사체와의 거버넌스를 만들어내자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런 그들에게 마포나 원주는 작지만 ‘산업화사회의 스페인 몬드라곤이나 캐나다 퀘벡을 탈산업화사회라는 새로운 과제 안에 투영시킨 중요한 사례’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원주를 다녀오는 버스 안에서 두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도 당신의 자리를 떠난 적 없는 장일순 선생님과 지난달 모처럼 방문한 일본 그린코프생협의 복지활동가 아주머니다. 그분들은 ‘모든 사람들이 정든 마을에서 마지막까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한 분들이고 지금도 노력중인 분들이다. 내가 만들어가는 협동적 관계망에 의해 내가 존중받고 돌보아질 때, 나는 진실로 행복한 법이다. 이런 협동의 과정에 한살림이 중심에 나서주길 바라고, 그런 분들과 함께 나도 이곳에서 행복해지고 싶다. 체제란 이런 기반 속에서 여물 듯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숨은 진주를 잘 닦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