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녹색평론> 2014년 3-4월에 실린 글을 옮겨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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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전선과 민족전선'을 넘어 '생명전선'으로
–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 즈음하여
글 박맹수 (원광대,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외재적 요인에서 내재적 요인으로
2014년 갑오년 첫 새아침을 경주 용담에서 맞이했다. 경주 용담은 1860년에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곳으로, 갑오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이 동학을 기반으로 일어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민중운동이었다. 혁명은 결코 사상이나 조직 없이, 그리고 오랜 준비 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120년 전의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수운 선생이 창도한 동학을 그 사상적 뿌리로 하고, 다시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의 34년에 걸친 동학 포덕활동, 즉 동학 접포 조직의 전국화와 핵심 지도자 양성을 기반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1894년에 조선특파원으로 주재하고 있던 한 일본인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는1,05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 최소 4분의 1에서 최대 3분의 1이 혁명 대열에 참여했다. 2백만에서3백만에 이르는 민초들이 보국안민(輔?安民)을 기치로 한 혁명 대열에 참여했던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근대적 교통통신망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 대다수 민초들이 문자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없었던 시대, 거기에다가 신분제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 지배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 어떻게 몇 백만의 민초들이 비일상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혁명 대열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860년의 동학 성립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할 때, 종래의 통설은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안으로는 삼정문란이 중요한 배경이었다고 강조해 왔다. 조선이라는 나라 안팎의 상황이 동학 창도 및 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킨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역사 발전의 동력을 밖에서 찾는 타율성론(他律性論)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이 같이 외재적 요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동학사상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것으로 해석하고, 동학농민혁명 역시 당시의 사회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동학을 창도하고 동학농민혁명이 촉발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영위, 그 주체적인 영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독자성과 보편성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립된 대항이데올로기”라거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후기 민란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바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이 지니고 있는 주체성과 보편성을 애써 외면하는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다.
올해는 1860년 동학 창도로부터 155년이 되는 해이자, 그 동학을 창도하였다가 ‘좌도난정(左道?正)’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수운 선생의 순도 150주년이 되는 해이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래 동학을 바라보던 시선을 전면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 발전의 주된 동력으로써 외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외재적 요인 중시 태도에서 벗어나 내재적 요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코페르니쿠스적 방향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지금이 아닐까 한다. 즉, 동학 창도 및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라도 동학이란 파천황적 사상을 만들어내고, 동학농민혁명이란 거대한 민중혁명운동을 불러일으킨 우리 내부의 주체적 힘, 주체적 문제의식이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중시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그 주체적 힘, 주체적 문제의식의 일단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임진,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조선후기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종래의 주자학 일존주의를 대신하여 다양한 사상적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주자학에 바탕한 기존 지배체제와 그 지배이념이 일종의 해체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미륵신앙과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비결신앙의 유행, 서학(천주교)의 전래와 그 급속한 전파 등이 바로 그런 사회현상을 대표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경판본과 완판본으로 대별되는 한글 고대소설의 보급이라든지, 판소리의 유행 등은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신분제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는 민초들의 사상적 지향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등의 반주자학적 사상에 의지하여 모순투성이인 기존 체제를 타파하려는 변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조선후기 민초들의 반체제운동 자료를 담고 있는 <<추안급국안>>이란 역사기록 속에 미륵신앙과 <<정감록>> 등의 비결신앙에 기초한 비밀결사들이 조선왕조에 반기를 든 사례가 무수히 등장하는 것이 그 구체적 증거들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지배이념으로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주자학을 대신한 다양한 사상적 움직임이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기존 지배체제를 비판하거나 기존 체제를 변혁하려는 민초들의 저항적 움직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를 일러 학계는 조선후기야말로 “민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대” 또는 종래 역사의 주체이면서도 역사의 객체로 억압받고 소외되어 왔던 민중이 ‘변혁주체로서 자기인식을 명확하게 갖기 시작하는 시대“로 설명한다. 요컨대, 조선후기에는 민이 역사의 주체로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1860년, 수운에 의한 동학 창도는 조선후기 이래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민중의식의 성장’을 총괄하는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민중 자신들의 ‘사상적, 정신적 자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동학이 성립되자마자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민중들이 동학사상에 공명하여 다투어 입도했다는 사실은 동학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는’ 시대에 얼마나 ‘민중친화적’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장차 거대한 민중운동의 에너지원이 발전되어갈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곡의 세월 120년을 넘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여기저기서 120주년을 맞이하려는 이런저런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동학 유적지와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찾아가는 크고 작은 답사 여행에서부터, 120주년을 기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학문적으로 성찰하려는 심포지엄도 여기저기서 조직되고 있다. 유족회를 비롯한 각종 기념사업 단체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을 현창하려는 노력도 활발하다. 또한, 소설 쓰기나 연극영화 제작을 통해 120주년의 의미를 살리고자 문화예술계 쪽 인사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들린다. 더더욱 반가운 일은 100일 수련회를 조직하여 동학사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동학적 수련을 통해 영성을 함양하는 동시에, 차세대 활동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각계각층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 즈음하여 분주한 지금, 어떻게 12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 제대로 된 기념이 될까 자문해 본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왜곡의 세월 120년을 뛰어넘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것이 12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는 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120년 동안 왜곡되어 온 동학! 120년 동안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동학농민혁명! 그 치명적 왜곡의 실상 몇 가지를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곡 1: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립된 대항 이데올로기다.” 이런 식의 왜곡은 현행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동학의 ‘동’의 유래와 그 근원을 찾아가 보니 동쪽이라는 방위로서의 ‘동’의 의미 외에, 동학은 ‘서에게로 활짝 열려진 동’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서학과 동학은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수운 선생이 서학과 동학은 “운도 하나요 도도 같지만, 다만 그 이치에서만 다르다”고 밝힘으로써 서학에 대해 활짝 열린 동학의 개방성을 잘 보여준 것이 그 반증이다.
“왜곡 2: 동학은 일종의 저항 사상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 특히 역사학자들은 동학을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일직선으로 연결 지어 그것이 혁명사상으로 기능했느냐 못했느냐는 식의 논의로 일관해 왔다. 동학을 그저 조선후기 민중운동의 저항 이념으로만 바라보려 하는 우를 범해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다수 연구자들은 동학이 “나쁜 병이 가득하여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는 시대”의 민초들을 도탄에서 건지기 위한 ‘살림’의 사상으로써 확립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특히 해월 선생에 의해 그 ‘살림’의 사상이 만인에서 만물에까지 확대된 사실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