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글읏
조영주(사쁘나)
극장으로 나선 길이었다. 대형 백화점 8층에 위치한 극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식료품점과 의류상점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나쳐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음식과 옷은 쌓여 있었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먹고 쉴 새 없이 입었다. 걸려 있는 옷들이 그렇듯 어쩐지 음식 또한 줄어들지 않았다. 만드는 족족 먹어치웠지만, 먹어치우는 족족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맛’을 고르는 소리, 씹고 삼키는 소리가 마구 뒤엉켰다. 소란 속에서도 맛은 강렬했다. 상상만으로도 단 맛, 짠 맛, 매운 맛이 입 안에 흥건했다.
식사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돈을 지불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어 누군가 옆에서 초시계로 재고 있다고 여겨질 만큼, 직원들의 민첩한 손놀림이 이어진다. 식사를 준비하는 직원들의 일사불란한 동작과 마찬가지로 밥을 먹는 데도 매뉴얼이 있다고 여겨질 만큼, 먹는 것도 일사불란하다. 입안에 있던 것들을 모두 삼키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직 입안의 것을 우물거리며 자리를 뜨는 이도 있다. 누가 밥을 빨리 먹는 것인가 경주하듯 이렇게 식사 시간은 끝이 난다. 대형 백화점 8층에 위치한 극장으로 가는 길에서 본 풍경, 수많은 음식들은 레일 위 초밥처럼 잠시의 쉼도 없이 종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질문은 그 다음이었다. 애써 시간을 내어, 그 풍경을 곱씹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필요’ 이상의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판매하기 위한 음식들은, 판매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되었다. 그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될까? 언제부터인가 ‘밥’은 ‘맛’에 대한 질문 그 이후가 사라졌다.
‘맛있냐?, 맛없냐?’ 그 이후, 맛있는 음식은 어떤 음식인가? 맛있는 음식은 모두 몸에 나쁜 걸까? 몸에 나쁜 음식은 구체적으로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건강한 음식은 어떤 음식인가? 건강한 음식은 모두 맛없는 걸까? 내가 소비한 음식의 값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걸까? 음식을 만든 사람? 음식의 재료를 생산한 사람? 내가 먹는 농산물은 어떻게 재배되는가? 어떤 땅에서 자라는가? 유기농산물인가? 농약을 치지 않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까? ‘필요’ 이상의 농산물을 재배하느라 땅의 힘을 과도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절한 양의 농사를 지으면 땅의 힘이 회복되어 자연의 힘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제기한 의문들은 바쁨 속에서 스스로 사라지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조금 더 몸집을 키워 답을 찾는 다양한 행동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중랑구 지역 청년들이 모여 ‘밥글읏’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다. 밥(먹고), 글(쓰고), 읏(차차, 힘내자!)라는 뜻의 밥글읏은 중랑구의 지역 청년들이 모여 만드는 생태문화밥상이다. 함께 밥을 지어 먹으며 밥글읏에 담긴 세상을 읽는다. 밥글읏 가득 밥과 글을 담는 모임이다.
밥 먹는 시간을 재구성한다.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을 드는 것이 시작이 아니다. 같이 장부터 보러 간다. 몹시 당연한 과정이지만, 어쩐지 사라져버린 순간을 복원한다. 봄에 난 냉이, 달래를 보며 봄이 봄 그대로 왔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몇 명이 먹을 음식일지 생각하고, 그 양에 맞추어 재료를 구매한다. 한 명이 먹을 양, 두 명이 먹을 양, 세 명이 먹을 양, 양을 가늠하는 연습을 한다. 재료 하나하나 원산지를,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확인한다. 재료가 담긴 장바구니를 든다. 나를 살찌우는 것들의 무게를 느껴본다. 재료를 손질한다. 가지에 매달렸던 것인지, 땅에서 바로 자라난 것인지 흙을 털어내며 그것들의 뿌리를 생각한다. 쌀을 씻고 앉히다보면 알게 된다. 비와 바람과 햇볕이 알알이 박혀 있다는 것을, 누군가의 허리가 수 만 번 굽혀졌다는 것을. 음식에 직접 간을 하며 맛을 본다. 단 맛, 짠 맛, 매운 맛이 좋아하는 ‘맛’이 되어버린 세상에 또 다른 맛을 조금씩 만들어 본다. 조금 덜 맵게, 조금 덜 짜게, 조금 덜 달게 그것도 하나의 ‘맛’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껴본다. 함께 밥을 먹는다. “맛이 있니?” 묻는다. 있다, 없다 아닌 자신이 느낀 맛의 표현은 다양해진다. 맛은 봄이기도, 여름이기도, 가을이기도, 겨울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맛이기도 하다. 아픈 몸이 낫는 맛이기도 하다. 레일 위 초밥처럼 분주하지 않은 맛이기도 하다. 밥글읏이 비워지면, 그 안에는 다시 글이 소복해진다.
밥 먹는 시간은 재구성되었다. 이 시간은 곧 글이 된다. 밥을 짓고 먹는 동안 들었던 생각을 종이 위에 옮긴다. 종이 위 이야기는 제한되어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나를 배불리 채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밥글읏의 온기부터 숟가락 사이 눈빛, 밥벌이의 고단함을 진 어깨, 배불리 먹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 등이다. 분주하게 사각거리는 연필소리가 멈출 때쯤 밥도 반드시 먹어야 하지만, 밥 먹는 시간 또한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된다. 밥 먹는 시간의 회복이 나의 회복임을, 알아채게 된다.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길을 가며 밥을 먹는 세상에서 모임 ‘밥글읏’ 이야기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한다. 다만, 밥 먹을 시간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필히 고민해봐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밥에 대한 질문들의 답은 하나가 아니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밥글읏의 청년들은 수많은 질문들을 의견으로 정리하고 이를 공유한다. 밥에 대한 질문은 실은 세상에 대한 질문들이기도 하다. 나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세상’을 외면할 수는 없다. 공중에 떠 있을 수 없다. 어딘가는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를 채우는 ‘밥’, 그 ‘밥’이 만들어 지고 있는 세상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모임 ‘밥글읏’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