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너머의 풍경
김수향 (카페 수카라 주인, 마르쉐@ 기획자)
2010년도에 북해도를 중심으로 삶을 이어온 선주민 ‘아이누 민족’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아이누란 아이누어로 ‘인간’이라는 뜻인데, 아이누는 그들의 삶에 필요한 모든 자연과 생명을 ‘신=카무이’로 생각하고 경외하며 살아 왔다. 천상에 사는 카무이는 때론 연어, 사슴, 곰의 옷을 입어 좋은 아이누의 먹이가 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오는데 곰의 옷을 입은 신이라니! 상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예쁜 풍경이 아닌가. 모습은 곰이지만 상대는 신이기에 곰을 잡으면 선물을 잔뜩 준비해 성대한 기도의 의식을 올렸다. 천상에 선물을 들고 간 카무이가 소문을 내어 다시 좋은 아이누 앞에 나타나준다고 믿어 왔기 때문이다. 집과 불의 카무이에게 올리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산에서 수렵이나 채취를 할 때는 산의 카무이, 나무의 카무이, 풀의 카무이에게 선물을 드려 감사를 전하고 필요한 만큼만 얻어 남김없이 먹었다. 아이누의 시선으로 보면 밥상에 올라가는 모든 음식은 자연이자 생명을 갖는 카무이며 사람은 카무이를 먹고 삶을 이어가는 존재이다. 이런 아이누 민족의 정신은 자연에서 생활의 모든 것을 얻어 살아 온 세상의 모든 선주민족의 세계관과 일치하며, 오래 전 동아시아의 우리 선조들이 자연과 생명을 대하는 태도 또한 아이누의 그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떨까. 나는 도쿄에서 태어나 거품경제 시대에 오사카와 요코하마에서 자란 후 20년 가까이 서울에 거주하는, 세계 최고의 풍요의 시대를 누리고 세계 유수의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도시의 인간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시장이나 슈퍼에는 상품으로서의 먹거리와 생활용품이 넘쳐났고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돈으로 사는 환경에 의문을 가진 적이 없었다. 식품의 안정성이 대두되고 나서는 소비의 방향이 주로 생협으로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을 돈과 바꾸어 사는 삶은 그대로, 아니 그렇게 사는 방법밖에 몰랐다.
나의 삶이 크게 바뀐 건 2011년 3월 11일, 가족이 사는 요코하마에서 지진을 경험한 며칠 뒤, 250킬로미터 떨어진 후쿠시마 원전의 수소폭발로 순식간에 공기, 물, 흙을 잃고 나서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연의 소중함을 알았을 때, 나는 그제야 인간이 공기, 물, 흙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지식이 아닌 본능으로 ‘알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무엇이 원인일까…? 수없는 질문 끝에 나온 답은 ‘나’였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만들어진 전기로 살아온 사실을 몰랐던 나, 산지를 꼼꼼히 확인하고 먹어야 할 상황이 될 때까지 내가 먹는 음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알지 못했던 나. 전기도 음식도 생산을 모르는, 생산과정이 안 보이는 또는 안 보이도록 숨겨져 있는 시스템에 익숙한 나머지 아무 의문 없이 소비에 안주해서 살아온 나. 모든 것이 자연에서 주어졌다는 상상력을 잃고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원전사고를 만든 당사자였다. 당연하듯이 살아온 세상이 갑자기 색을 잃어 보이기 시작했고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 밀려 왔다.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 멕시코 시골에서 만난 선주민족들의 장터, 유럽이나 동남아에서 만난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교환의 원점으로서의 ‘파머스마켓(농부시장)’들이 내 머리에 떠올랐다. 막연하게 주어지는 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생산자에게 생산과정을 물어보고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장보기, 그런 삶이 살고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도시농부시장 마르쉐@을 만들어갔다.
(사진 출처: 마르쉐@ http://marcheat.net/index.php/archives/date/2016/03)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는 농부시장’ 마르쉐@은 4년째를 맞았고, 지금도 매번 장이 열릴 때마다 나에게 배움과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자연과 생명이 살아 숨 쉬는 현장에서 그들과 호흡해 사는 농부를 꾸준히 만난다는 건, 도시 사람들에게 자연과 생명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하는 흔치 않는 기회이다. 지금 이 시대, 농부를 직접 만나는 농부시장은 자연에서 멀어진 도시와 자연을 다시 한 번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이 되어 가고 있다. 농부들이 들고 나오는 자연과 생명은 또 얼마나 다양한지! 우리는 마르쉐@에 모이는 무농약, 유기농, 자연농와 같은 농법의 다양성 사이에서 흙과 미생물, 곤충, 풀이라는 생명에 대해 배우고, 단일품종, 다품종 소량생산, 노지, 하우스 등 재배의 다양성 사이에서 제철과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F1 품종, 이어가는 씨앗, 토종 사이에서 씨앗이라는 생명의 근원을 배우고, 유정란, 방사 달걀, 배합사료 먹인 달걀, 100% 자가사료로 자란 달걀의 다양성 사이에서 동물의 생명을 배운다. 지금 마르쉐@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차이들은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 주고 있다. 요리사가 농부의 채소로 만들어 내는 먹거리 또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데 먹거리의 맛은 물론 그 생명이 내 몸에서 피가 되고 세포가 되는 경험은 ‘인간은 자연을, 생명을 먹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머리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배움과 경험의 축적은 요리사나 손님을 자연 속으로 이끌고 농부를 찾아가거나 농의 길로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농부는 요리사의 손을 통해 스스로의 작물이 맛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함께 경험하고 작물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매달 만나는 농부와 농부, 요리사와 요리사, 손님과 손님 사이에는 지혜의 나눔과 유대가 일어나고 나의 길을 가는 용기를 주는 든든한 동지를 얻는다.
요즈음 나의 장보기는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살지가 아니라 어떤 생명을 먹을지, 어떤 자연을 선택할지로 서서히 기준이 변해가고 있다. 이제 우리집 밥상 너머에는 농부가 있고 땅이 있고 자연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감사할 대상이 가득하다. 밥상에서 카무이를 보는 아이누의 차원은 아직 멀었지만 원래 인간이 갖고 있었던 생명, 자연과의 관계를 조금씩 되찾아가면서 나는 희망의 씨앗을 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