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에 너와 나, 온 생명에 대한 감사를 담아
김지현 (부산한살림)
매년 11월 농번기가 지나가고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될 즈음이 되면, 부산한살림은 큰 잔치를 엽니다. 도시 소비자의 몸을 살리는 먹을거리를 상품이 아닌 생명으로 길러준 생산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모시는 날, 함께 밥을 나누어 먹는 날, ‘생산자 소비자 만남의 날’입니다.
행사 준비
11월이 다가오면 조합원들은 분주해집니다. 거주 지역을 기반으로 삶을 나누는 마을모임, 같은 요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동아리 형식으로 꾸려가는 소모임, 이사회의 위임을 받아 특정 임무를 수행하는 위원회 등 각 분야의 조합원 모임 구성원들이 모여 행사 준비를 의논합니다. 행사에 대한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을 잡고나면 각 모임에서 역할을 나누어 맡아 준비를 진행합니다. 행사 기획, 공연 준비, 생산자께 드릴 선물 만들기, 음식을 준비 등 행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조합원의 손으로 합니다. 전문가의 손을 빌리면 훨씬 쉽고 보기에도 그럴싸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정성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회의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오리고 붙이고 바느질하고 끓이고 볶습니다. 그 과정도 즐거운 놀이이고 잔치입니다.
여는 마당- 대동 놀이
‘생산자 소비자 만남의 날’이 열리는 부산한살림 두구동 물류센터 마당에서 제일 먼저 사람들을 반겨주는 것은 조합원 차모임 ‘시명회’입니다. 따뜻한 차와 정갈한 떡을 준비하여 정성스럽게 맞이합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하나 둘 사람들이 모이기를 기다립니다. 행사가 시작되기 30분쯤 전 한 판 놀이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이는 조합원 소모임 ‘놀이연구회’가 진행하는데, 몇 해에 걸쳐 학교 CA활동 강의도 하고 유치원 교사들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한 노하우를 한껏 발휘합니다. 어른, 아이 구분 없이 함께 어울리는 놀이는 줄다리기, 단체줄넘기, 제기차기, 오징어달구지 등 매해 다르지만 즐거움은 한결같습니다. 그동안 한쪽에서는 행사장이 꾸려지고 무대가 준비됩니다.
첫째 마당- 합수식, 합곡식
행사 준비가 마무리되면 이날의 사회자를 맡은 조합원이 행사의 시작을 알립니다. 곧이어 조합원 풍물 소모임 ‘한소리’의 길놀이로 시선을 모으고 마음을 모아 본격적으로 생산자를 모시는 잔치를 시작합니다.
생산자를 모시는 날이라고 해서 생산자가 그저 받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생산자는 각 지역에서 내가 기른 잡곡과 내가 먹는 물 한 병을 가져옵니다. 이날의 밥은 조합원이 준비한 쌀에 이 잡곡을 섞어 이 물로 짓습니다. 밥을 짓기 전에 물과 곡식을 한데 모으는 합수식, 합곡식을 하는데, 주인공은 생산자입니다. 어디서 온 무슨 생산자 누구누구인데 이 곡식은 이렇게 길렀고 이 물은 이러한 물인데 오늘 함께 나누어 먹으려고 가지고 왔다고 흠씬 자랑을 합니다. 산삼 썩은 물이 섞여 흐른다는 산골 약수, 차를 우려먹으면 차 맛이 살아난다는 맑은 물, 새벽에 산에 올라가 떠서 정기를 머금었다는 정안수, 국가가 인증하는 수돗물 등 온갖 물과 온갖 곡식으로 큰 가마솥에 밥을 안칩니다.
ⓒ한살림부산
둘째 마당- 공연
밥이 구수하게 익는 동안 마당에서 소박한 공연이 펼쳐집니다. 생산자, 조합원, 조합원의 자녀 등 재주꾼의 춤, 노래, 연주도 있고 어설픈 조합원 모임의 공연도 있습니다. 박장대소 분장쇼, 배꼽 빠지는 촌극, 눈물을 쏙 빼놓는 차력 쇼 등 여러 조합원 모임에서 준비한 공연이 줄지어 무대에 오릅니다. 무대에 오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제 빛으로 반짝입니다. 멋지게 마무리한 공연도 실수연발 엉망진창 공연도 모두 즐거운 추억이 됩니다.
셋째 마당- 밥모심 의식
웃고 즐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가마솥 밥 냄새가 침샘을 자극합니다. 뱃속이 밥을 달라 아우성입니다. 밥을 내 몸 안에 모실 시간입니다. 가마솥 뚜껑을 열어 잘 지어진 밥을 푸고 조합원들이 미리 준비해온 반찬을 소복이 담아 가운데에 진상합니다.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어 먹자고 모였으니 이 밥이 어떻게 왔으며 함께 먹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밥 모심문을 낭독하며 되새깁니다. 그리고 3배를 하며 이 밥이 있게 한 모든 것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내 안에 모셔진 생명을 향해, 함께하는 당신을 향해,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온 세상을 향해 절합니다. 그렇게 모두의 감사와 축복을 밥상에 담습니다.
밥 먹을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각자 그릇에 먹을 만큼의 밥, 국, 반찬을 담아 삼삼오오 모여 앉습니다. 오늘의 일을 곱씹으며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종일 웃을 일이 많았으니 밥 먹는 시간도 웃음이 가득합니다.
넷째 마당- 선물 전달과 윤회 악수
생산자를 모시고 따뜻한 밥을 대접했습니다. 어설프지만 재롱도 부렸습니다. 하지만 뭔가 좀 모자랍니다. 귀한 분들 모셨으니 뭐 하나라도 더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수십일 전부터 조합원들이 모여 선물을 만들었습니다. 손바느질 소품이나 천연 염색 물품에 편지를 더해서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그 선물을 드리기 위해 다시 함께 모입니다. 둥근 원을 만들어 생산자와 조합원이 마주하고 선물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그 원이 뱅글뱅글 돌며 서로 악수합니다. 조합원은 생산자에게, 생산자는 조합원에게 서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에 바쁩니다. 감사의 마음은 돌고 돌아 서로의 마음속에 가득 찹니다. 애틋한 마음은 악수를 포옹으로 바꾸어 어느새 윤회 포옹이 됩니다.
뒤풀이
우리 문화는 무슨 모임이건 모임이 끝나고 바로 헤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행사가 끝나고 비로소 이날의 하이라이트가 진행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무를 즐기는 우리 오랜 풍습대로 노래자랑이 벌어집니다. 부르고 싶은 사람 아무나 순서도 없이 자유롭게 노래하고 춤춥니다. 한 솥 밥 먹은 가족이기에 자기를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 노래자랑에서 이날의 스타가 탄생합니다. 스타는 때로 조합원이 되기도 하고 생산자가 되기도 하고 실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뒤풀이의 또 뒤풀이가 열립니다. 생산자와 조합원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먼저 간 사람들은 오래도록 먼저 간 것을 아쉬워합니다.
ⓒ한살림부산
온 생명을 모시는 잔치
행사장 빌리고 출장 부페 부르고 전문사회자 섭외하고 공연 팀 불러서 진행하는 보통의 행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뭐 저리 허접한 행사가 있나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몸에 좋은 것 찾아 유난 떠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행사도 저리 유난인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쉽게 쉽게 할 일을 사서 고생한다거나 찌질하게 선물을 만들어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밥상에 오르는 먹을거리가 어떻게 우리 밥상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냥 몸에 좋은 것 사 먹고 기분 좋은 데서 그치는 소비자였다면 돈 모아 행사를 치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산한살림 조합원들은 생산지 방문을 하면서, 생산자를 만나고 그 삶을 보면서, 생산지의 농작물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보면서 먹을거리가 시장에서 주고받는 돈의 가치를 넘어서는 귀한 생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생명이 밥상에 오기 위해서는 해와 비와 흙과 바람이 함께 힘을 모으고 농부의 손길이 보태어져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머금어 맺은 생명이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나누어주기에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대부분 생명으로 길러지기보다 눈에 보기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집니다. 자연과 동업하면서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크기, 색깔, 모양을 언제나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자연을 거스르는 농사를 짓습니다. 햇볕과 바람을 거스르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보일러로 가온하고, 땅심을 거스르기 위해 합성 비료를 뿌리고, 씨앗이 지닌 생명마저도 거스르기 위해 유전자를 조작합니다. 상품을 만들겠다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만 만들어진 먹을거리에 무슨 생명이 있을지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비교적 쉬운 농사를 뒤로하고, 생명을 생명으로 기르기 위해 자연과 동업하는 어려운 농사를 선택해준 생산자는 그래서 부산한살림 조합원에게 귀한 사람들입니다. 귀한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배운 방식대로, 생명이 생명을 대하는 방식대로 맞이하는 것이 ‘생산자 소비자 만남의 날’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생명이 다른 생명을 자신의 몸으로 모심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또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다른 생명을 기르듯이 생산자에게서 받은 고마움을 내 온 정성으로 모시기 위해 무엇이든 우리 손으로 합니다.
그리고 모심의 중심에 밥을 놓습니다. 온 우주의 기운으로 맺은 생명을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손길 보태어 지은 밥입니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고스란히 담은 밥입니다. 세상 모든 생명이 관계함으로써 존재함을 밥 한 그릇이 말해줍니다. 그런 밥에 축복을 담아 귀하게 모심으로써 온 생명을 모십니다.
잔치가 끝나고
한바탕 잔치가 끝나고 나면 모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날 하루 잘 모셔진 밥상을 함께 나누었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는 일상의 바탕이 너무나 먼 거리에 떨어져 있으니 일상 속에서는 먹을거리가 욕구충족의 수단이 되고 관계는 분절되어 옆집과도 오가지 않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찼던 그날의 기억은 부산한살림의 DNA가 되어 자신의 생활을 바꾸는 조합원들의 작은 실천들을 낳고 또 낳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밥 모심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모여 뭇 생명을 내었습니다.
이렇게 볍씨가 싹을 틔웁니다.
나락 한 알이 맺히기 위해서는
해님도 있어야 하고 달님도 별님도 있어야 합니다.
비와 구름, 바람도 있어야 합니다.
길가의 풀 한포기 땅속의 미생물들도 도와야 합니다.
그기에 농부님과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움이 더해졌습니다.
온 우주 생명의 협동과 희생을 통해 나락 한 알을 내었습니다.
이렇게 이 음식들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땅과 물, 공기와 불이 합쳐져
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수고를 하고 생명을 바쳤습니다.
여기 이 음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듯이
우리도 역시 큰 생명에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고맙고 고마운 일을 되갚아야 합니다.
한울이 한울을 먹습니다.
한울은 한울을 먹음으로써 한울로 살아갑니다.
한울이 다른 한울을 먹는
밥을 모시는 일은 다른 한울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밥을 모시는 일은 다른 한울과 더불어 서로 살리고 서로 사는 일입니다.
밥을 모시는 일은 그래서 뭇 생명을 살리는 축제입니다.
밥 모심이 곧 축제입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전 인류의 진화와 경험이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 조상의 혈통과 기가 내 안에 있습니다.
나를 모시는 것이 우리 부모 조상을 모시는 일입니다.
전 인류를 모시는 일입니다.
나를 모시는 일이 부모 조상을, 전 인류 우주생명을 모시는 제사입니다.
밥 모심이 곧 제사입니다.
매일 매일의 밥모심이 제사이고
매일 매일의 밥모심이 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