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밥상

 

부끄럽지 않은 밥상

최성현 (농부, 강원도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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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finalstraw.org)

 

1.

중국이 약진하고 있다고 한다. 벌써 일본을 앞질렀다고 한다. 곧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고도 한다. 그에 비례하여 황사와 미세먼지의 양과 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약진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실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황사나 미세먼지는 직접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 자주 나타나 두려울 정도다. 농도가 높은 날에는 맑은 날인데도 구름이 낀 것처럼 하늘이 어둡다. 불그스름한 빛깔의 하늘! 꼭 지옥 속에 든 것 같다. 서울 얘기가 아니다. 강원도 산골인데도 그렇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는 마주선 연인의 얼굴이 안 보이는 날이 있다고 한다. 자동차는 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녀야 한다. 평일인데도 학교와 공공기관의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이 사람 저 책을 통해 나는 그것이 중국인이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밥상을 차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인 걸 알게 됐다. 중국인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밥상을 차린다. 하늘을 더럽히며 요리를 한다. 큰 나라답다. 그 양이 엄청나다. 밥 냄새가 이웃집까지 가는 것처럼, 중국인이 요리를 하며 만든 먼지가 우리나라와 일본, 어떤 날에는 미국까지 간다 한다.

 

밥상을 차리려면 쌀과 채소가 있어야 한다. 그 둘은 논과 밭에서 온다. 밥상은 논밭이 있어야 차릴 수 있다. 미세먼지와 황사는 도시의 공장, 자동차 배기가스 등이 주요 원인이지만 논과 밭도 크게 한몫을 한다. 과도한 목축과 재배가 불러온 사막이 문제인 것은 많은 사람이 안다. 하지만 사막만이 아니다. 농경지도 문제다. 농경지에서도 많은 양의 흙먼지가 바람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다. 겨울과 이른 봄의 농경지는 사막에 가깝다. 풀 한 포기가 없다. 황사가 겨울철과 이른 봄에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연합의 조사에 따르면 전 지구에서 해마다 1천 만 헥타르의 표토가 바람과 빗물에 의해 경작지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전 세계가 같다. 모든 나라가 중국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밥상을 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하늘과 땅을 더럽히는 방식으로 밥상을 차리고 있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농부들은 논과 밭과 과수원에 퇴비와 화학비료를 뿌린다. 바람과 물은 그것을 가져간다. 1년 내내 가져간다. 다음해 봄이 되면 농부는 다시 퇴비와 화학비료를 뿌린다. 빚을 내어 사다가 뿌린다. 물과 바람은 다시 가져간다. 그 반복이다. 이것이 현대 농업의 맨 얼굴이다. 물을 따라 간 농경지의 겉흙이 강을 더럽힌다. 그 속에는 화학비료와 농약, 퇴비가 섞여 있다. 바람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흙먼지 또한 같다. 어느 한 나라의 얘기가 아니다. 온 세계가 같다. 모두가 자연환경의 파괴 위에서 세 끼를 먹고 있다. 미래가 없는 길을 걷고 있다.

 

유기농이 있지 않느냐고? 아니다. 무식한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아닌 것 같다. 유기농 또한 같은 방식으로 밥상을 차리기 때문이다. 무엇이 같은가? 땅을 간다는 게 같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아는 한, 유기농에서는 여러 종류의 친환경 농약과 유박을 논밭에 넣는다.

 

부끄럽지 않은 밥상. 지구 위 어디에도 없다. 안 좋은 밥상만 있다. 인간만을 위한 밥상이 있을 뿐이다. 벌레와 풀의 죽음과 고통 위에 차려지는 밥상이 있을 뿐이다. 지구를 파괴하는 밥상이 있을 뿐이다. 좋은, 부끄럽지 않은, 미래가 있는, 평화로운 밥상은 지구 어디에도 없다. 인류는 그런 밥상을 아직 아무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

 

길은 없을까? 있다. 땅을 갈지 않는 게 길이다.

 

2.

어떻게 땅을 갈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느냐고? 그런 길이 있다.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그 길을 열었다. 그 뒤를 여러 사람이 따르고 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나는 논 450평에 밭 350평, 숲밭 150평의 농사를 짓고 있다. 합쳐 1천 평이다. 모두 갈지 않는다. 비는 우리 논이라고 비켜 가지 않는다. 바람은 우리 밭이라고 돌아가지 않는다. 여러 종류의 비와 바람이 온다. 폭풍우까지 온다. 오지만 그들은 우리 논과 밭에서 뭐 하나 가져가기가 어렵다. 폭풍이 사나흘을 흔들어보지만, 혹은 대엿새 차고 때려보지만 우리 논밭은 흙을 잃지 않는다. 해마다 빼먹지 않고 오지만 어느 태풍도, 어느 홍수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 가지다. 첫째는 갈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논에서 난 것은 모두 논에, 밭에서 난 것은 모두 밭에 돌려주기 때문이다. 우리 논밭에 벌거숭이 땅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 논밭은 1년 내내 작물과 풀의 잔사로 덮여 있다. 그것들이 폭풍우와 비바람으로부터 논밭을 지켜주고 있다.

 

갈지 않으면, 그리고 그 위에 거기서 난 것이 덮여 있으면 그것을 밥으로 벌레와 미생물과 소동물이 산다. 모두 즐겁게 산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산다. 그들도 먹고 싼다. 재주가 좋다. 향기로운 똥을 싼다(어떻게 아느냐고? 코가 있기 때문이다. 논에 가면 논 냄새가 나지 않는가? 밭에 가면 밭 냄새가 나지 않는가?). 벼는 그 똥을 좋아한다. 배추나 고추도, 고구마나 감자도, 팥이나 수수도 그 똥을 좋아한다. 모두가 좋아한다. 그 덕분에 비료가 필요 없다. 퇴비를 만드는 고생을 안 해도 된다. 조금 작기는 해도 맛있다. 심고 거두기만 하니 고맙다.

 

그 뿐만이 아니다. 풀이 있으면 벌레의 종류가 다양해진다. 사람처럼 벌레도 벌레마다 좋아하는 풀이 다르다. 풀의 종류가 다양하면 그만큼 벌레의 종류도 다양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먹이사슬의 폭이 두꺼워진다. 먹이사슬이 건강해지면 어느 한 벌레가 득세하기 어렵다. 병충해 피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농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책을 읽는 분이라면 이런 이야기쯤 귀에 딱지가 않게 들어 귀를 막고 싶겠지만 나도 놀랐다. 그것을 내 논과 밭에서 경험하며 나도 놀랐다. 무경운, 무농약, 무비료, 무제초가 헛말이 아니었다.

 

3.

여기까지 잘난 척을 많이 했지만 나는 전업농가가 아니다. 자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집 3대 다섯 식구가 먹고 남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무식한 탓인지 몰라도, 현대 문명에는 미래가 안 보인다. 현대문명 어디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밥상을 차릴 길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밥상은 미국 전 대륙의 사막화 위에서 차려지고 있다. 그 뒤를 쫓고 있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미국과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 오십보백보다. 사막화와 환경오염을 벗어난 밥 한 끼가 지구상에는 없다. 인류는 너나할 거 없이 모두가 하늘과 강과 땅을 더럽히며 세 끼 밥을 먹고 있다.

 

인류는 1만2천 년 전부터 농경을 시작했다. 더 많은 생산을 보장하는 농경을 통해 인류는 인구를 불릴 수 있었고, 마침내 인류는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룹 전체를 보면 성공했지만 개개인의 삶은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좁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기계와 농약과 씨름하며 한 생을 보낸다. 기아, 비만, 질병 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인류도 많다. 감사와 기쁨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대형 기계의 소음이 가로막아 농부는 새소리를 듣지 못한다. 꽃이 피어도 농부의 코에 들어오는 것은 진동하는 농약 냄새뿐이다. 주요 가축인 소와 돼지와 닭에 인류가 하고 있는 짓은 하늘이 무서울 정도다. 인류는 너무 나쁜 방식으로 밥상을 차리고 있다.

 

농경의 핵심은 경운이다. 모든 농사는 땅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경운에는 인류의 미래가, 지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인류는 무경운의 새 날을 열어가야 한다. 판을 다시 짜야 한다. 인류는 ‘인류’를 넘어서 지구를 보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