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살림’이라고 하면 지금은 ‘죽어가는 세상, 병들어가는 지구와 뭇 생명을 살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원래는 주부가 집안에서 하는 노동의 의미로만 국한되어 쓰였습니다. 초기 생명운동의 이념을 체계화하면서 김지하 시인이 이 ‘살림’의 의미를 재평가합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주부들의 가사노동, 즉 ‘살림’이 바로 집안 사람들을 ‘살리는’ 신성한 것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이런 노동을 ‘살림’이라고 한 데는 우리 선조들의 삶을 바라보는 예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부들의 살림을 집안에만 국한시켜야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뭇 생명들이 파멸의 위기에 처한 생태 위기, 생명 위기 시대에 주부들의 살림이 지구적인 차원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운동에서는 ‘살림’에 대한 강조를 성 역할론을 고착화시키는 이데올로기라고 강력히 비판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살림이란 거룩한 일을 주부나 여성들의 역할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살림’이라는 용어가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감금되고 고정된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으로 실천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나가 버린 이야기입니다만, 생명운동을 처음 내세운 한살림 초기에는 ‘생명운동’이라는 용어보다 ‘살림운동’이라는 말을 보편화시키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시청각 자료들은 “세계의 살림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명사형인 ‘생명’보다는 구체적일 실천의 행위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고 ‘살아 움직임’을 표현하는 동사형인 ‘살림’이란 용어를 좀더 확장시켜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생명운동이 보편화되었습니다. 한 용어가 사회적으로 보편화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 문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주체의 의도와는 무관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우리의 운동을 ‘살림운동’이라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