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의 새로운 길을 찾아서 ⑤>
“책임지고, 반응하고, 투명한 정치”
시민 직접 참여로 가능하다
정치벤처 ‘와글’ 이진순 대표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 한살림을 포함한 협동조합 조직에서도 조합원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성이 새삼 강조된다. 한겨레신문 ‘열림’ 인터뷰로 잘 알려진 이진순 님은 1년여 전 소셜 정치벤처 ‘와글’을 창립해 현재 대표를 맡고 있다. “군중들의 아우성을 영양가 있는 우리 시대의 자산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정치혁신과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실험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와글은,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정치 분야의 새로운 혁신 사례들, 특히 시민들이 참여해 만들어내는 사례들을 통해 직접민주주의라는 시대적 흐름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모아 올해 초 『듣도 보도 못한 정치』(문학동네)를 발간하기도 했다. 지금 여기, 우리의 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조금 먼저 고민하고 실행하는 <와글>, 그리고 이진순 대표의 이야기 속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창의적 방법들에 대한 힌트가 담겨 있다.
정치는 공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모심: <와글>을 간단히 소개해주신다면요?
이진순: 저희는 보통 정치 스타트업이라고 얘기하는데, 스타트업이라는 용어를 생소해 하시는 분들께는 정치 혁신에 관한 일을 하는 소셜벤처회사라고 말씀 드려요. 벤처회사인데 영리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사회적인 영향력과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는 회사들을 소셜벤처라고 하잖아요. 저희는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 분야의 새로운 혁신과 그 파장을 일으키는 데 목적을 두고 만들었어요. 주로 시민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혁신, 정당혁신, 지역단위 풀뿌리민주주의에 관한 다양한 사례와 새로운 동향을 소개하고 그렇게 바꿔나가야 한다는 캠페인 작업을 하고 있어요.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기반으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쉽게 정치적 결정이나 집단적 의사결정에 참여하게 하는 앱을 만들거나 플랫폼을 개발하는 일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심: 직접 만드신 프로그램도 있나요?
이진순: 주로 다양한 앱을 소개하거나 기획에 참여해 왔고, 자체적으로 내놓은 건 많진 않은데 예를 들면 테러방지법 관련 필리버스터 할 때, filibuster.me라는 걸 만들었어요. 국회의원들은 시민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는 사람이니까, 누구나 필리버스터 하는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적을 수 있도록 한 거죠. 필리버스터 시작한 날 바로 만들어서 다음날 아침에 론칭했는데 굉장히 호응이 좋았어요. 또 하나는, 투표할 때 적어도 정당의 정책은 알고 찍어야 하니까 내가 생각하는 정책 방향과 가장 일치하는 ‘핑코리아(pingkorea.com)’라는 투표가이드서비스를 개발했어요. 그 두 개는 저희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리고 지금 준비 중인 건 ‘국회톡톡(toktok.io)’인데, 보통 국회의원실에 찾아갈 수 있는 인맥이나 ‘끈’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익단체들이 직접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자기네들 주장을 전달하고 다양한 형태의 압력을 행사하잖아요?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나 절실한 요구가 있어도 그걸 입법 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없거든요. 그래서 시민들이 합법적이고 공개적으로 입법 운동을 벌여서 국회의원과 매칭할 수 있는 사이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농수산물 유통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쟁점이나 원하는 바가 있다면 개인이나 단체가 공개적인 온라인 플랫폼에 제안하는 거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일정 수준이 넘으면 그걸 상임위에 올리고 국회의원과 매칭이 되면 일종의 코워킹 그룹이 돼서 같이 간담회를 연다거나 사례 수집을 한다거나 혹은 입법에 필요한 여러 제반 활동들을 해나갈 수 있게 하는 거예요.
'와글' 대표 이진순 님
모심: GMO반대운동 같은 경우에 동의하는 국회의원들과 같이 공청회 하기도 하는데 비슷한 것 같네요.
이진순: 맞아요. 그런데 그 경우는 처음부터 관심 있는 국회의원들을 알고 있고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다면, 그런 활동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예요.
모심: 와글 소개를 보니 아트 폴리틱스(art-politics)라고 하셨던데, 핵심 용어인 것 같아요. 설명을 좀 더 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진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공학적으로 생각하는 시각이 지배적이고 그런 사람이 전문가가 되는데 저는 그 발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측이 맞을 때도 별로 없고요. 선거 때마다 많은 경우에 ‘예상치 못한 이변’이라거나 ‘뜻밖의 결과’라고 하잖아요. 원래 원초적인 의미의 정치라는 건 단순 더하기 빼기의 계산이 아니라 어떤 화학적인 반응 같아요. 지연, 학연, 계파 차원을 넘어서서, 사람들이 자기가 사적으로 특별히 이익을 보는 게 아니더라도 저런 사람이라면, 혹은 이런 방향으로 우리나라를 바꿔 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정치라는 게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하고, 그럼으로써 집단적인 신명이 나는, 예술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그동안 새로운 정치혁신 사례들을 통해서 뽑은 키워드가 각각 A, R, T에 해당하는 핵심 요소예요. 책임지는(accountable), 반응하는(responsive), 투명한(transparent) 정치죠. 우리는 왜 시민이 참여하지 않는가, 해외에서는 저렇게 하지만 우리는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뭔가 요구할 때 제대로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관심해진 거라고 보거든요. 새로운 혁신 정치세력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바로 공개적으로 답하는 거, 반응하는 거예요. 된다거나 안 된다거나.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되면 그게 공개적인 약속이자 기록이고 그래서 나중에 제대로 안 지켰을 때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잖아요. 그런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A.R.T politics라는 표현을 써요.
모심: 주로 온라인 기반 정치 참여를 강조하시는데,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이진순: 저는 1982년에 대학에 들어간, 소위 말하는 86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제 주변에 80년대 운동을 했던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어서 그분들이 정치권에 대거 들어가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사람 중 하나인데 정치권 안에서는 결국 다 비슷비슷하게 규정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게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큰 절망감과 아쉬움이었어요.
저는 마흔 살에 유학을 갔는데 꼭 공부를 하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 그냥 이 나라가 싫어져서(웃음) 홧김에 나갔어요. 그런데 특별히 제가 86세대라서가 아니라,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장년 세대는 누굴 욕하고 떠날 수 없는 세대인 것 같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세월호 이후에도 어디선가 얘기한 적이 있어요. 삼십 넘은 사람은 이민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우리는 이미 이 배의 승무원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는데 승무원이 다른 배로 떠나고 싶다고 해서 떠나지나요? 승객들을 먼저 어떻게든 조치 취해놓고 떠나거나 말거나 해야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장년 세대는 그렇게 헬조선이다, 떠나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떠나서 행복할 수 있는 세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공부를 하게 됐는데, 우리가 87년까지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얻은 건 뭐고 그 이후에는 왜 뭐가 잘 안 되고 있을까. 소위 요즘 말하는 '포스트 민주화' 시대에 뭐가 부족해서 뭘 못 하고 있는 걸까 고민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시대에 시민들이 자기 목소리를 드러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고 그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요. 그래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이나 정치 변화를 공부하게 됐죠.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
모심: 현재 시대 패러다임이 비공개에서 공개, 독점에서 공유, 결과보다는 절차와 과정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는데 정치 부분에서의 패러다임은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고 또 어떤 방향이 좋은 방향이라고 보시는지요?
이진순: 사실 일이십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정말 놀라울 정도로 라이프스타일이 많이 바뀌었잖아요. 얼마 전 지진이 났을 때 부산, 경남 쪽은 재난 문자가 왔다던데 그조차 이미 다 인지하고 난 뒤에 온 거죠. 관련 방송도 몇 개 방송사에서만 했고, 사람들이 국민안전처에 빗발치듯 전화를 걸었다는데 통화량 폭주하고 홈페이지도 안 열리는 상황이었잖아요. 이럴 때 중앙행정부나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건 엄청난 문제죠. 그런데 한편으로 사람들은 SNS를 통해서 이미 소식을 접하고 나름의 대비책도 생각해요. 과거에 비해서 대리자 집단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의사결정을 하지 않고 직접 정보를 찾아보고 그걸로 판단하는 방식으로 소통체계가 변화하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몸에 이상한 두드러기가 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뭘 할까요?
모심: 일단 인터넷에 물어보죠.(웃음)
이진순: 맞아요. 심지어 내과를 가야 될지 피부과를 가야 될지까지도 인터넷을 찾아보고 간단 말이죠. 저는 시민사회단체나 언론기관이 하는 역할도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고 봐요. 사람들은 이미 네트워크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전달하고 확산시키고 그걸로 판단하는데 그런 게 더 어리석은 판단이거나 무지몽매한 대중들의 이성 잃은 행위인가? 절대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다만 정보가 충분히 풀려 있지 않기 때문에 제한된 정보로 부정확한 판단을 할 가능성은 있겠죠. 하지만 다수가 소통과정에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모여지는 의견이 밀실에서 전문가 몇몇이 주고받는 토론으로 정해지는 결론에 비해서 결코 우매하거나 부족하지 않고, 그런 의견들이 정치나 행정에 얼마나 기민하게 반영되느냐가 우리 삶의 질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보거든요. 근데 그걸 못 하는 이유는, 원래 대의제라는 게 시민들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모아서 수렴하고 타협이나 협상을 통해서 더 나은 솔루션을 내기 위해 도입됐겠지만 그 대리자 역할 자체가 직업이 돼버리면 그 사람들은 그 직업을 계속 유지하고 권력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정보의 필터링 혹은 왜곡된 유통 같은 부작용을 낳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민들 다수가 원한다 하더라도 소수 직업 정치인들의 이해관계라든가 그걸 뒷받침해주는 자본이나 언론의 커넥션 안에서 계속 굴절되는 거죠. 직업 정치인의 활동이 특권계급처럼 행사되지 않도록 부단히 견제하고 통제하고 견인해내는 힘은 공개적인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의해서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모심: 정보 공개와 관련해서 특히 재난 같은 경우 일부 주류 언론에서는, 공개되면 적절한 대응책도 없는데 혼돈을 낳지 않느냐 하는 논리를 펴잖아요. 그래서 제한된 정보를 주는데, 예를 들어 방사능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진순: 저널리즘에서도 특히 퍼블릭 저널리즘이나 시민 저널리즘에서는 SNS 이후 시대에 재난보도에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라든가 크라우드소싱 뉴스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가 굉장히 많이 강조되거든요. 중국 쓰촨성 지진이나 카트리나 복구작업에서도 그랬고, 사실 재난 시마다 가장 기민하게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문제점을 발견해낼 수 있는 게 크라우드소싱 된 일반 시민들의 제보예요. 그런데 중국 같은 경우에도 그게 그 지역의 부패한 관리들의 부실공사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거나 하기 때문에 통제하려고 한 적이 있었고, 유사한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는 메르스나 구제역 때 있었죠. 그런데 사실 통제하려고 해서 통제되는 게 아니거든요.
모심: 이미 그럴 수 없는 시대라는 거군요.
이진순: 예. 그건 오히려 관의 정보에 대한 불신감만 높이는 꼴이고, 재난 관리에서도 최악의 수라고 생각해요. 빨리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고 거기에 정직하게 대처해야 사람들이 정부나 공식 기관에서 하는 얘기를 믿지 않을까요? 우리가 했던 구제역 지도 만들기라든가 이런 것들은 사실 관에서 했었어야 되는 거죠. 적어도 같이 협조하자고 해야 하는 일인데 마치 독립운동 하듯이 몰래 싸워가면서 하는 상황이 말이 안 되는 거죠. 결국은 국민의 생명이나 안전에 관련된 일인데 어떤 게 통제해야 할 기밀정보인가에 대한 판단조차도 저는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에겐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모심: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직접 참여의 의미가 있는데, 한편으로는 선출된 사람들이 있는데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이 영향을 행사해버리면 일종의 이중권력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반론도 있는 것 같아요.
이진순: 저희가 소개하는 새로운 혁신 정당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선출된 사람들이라는 건데요. 이 사람을 후보에서부터 누가 결정하는지가 아주 명확해요. 공개적으로 온라인에서 투표를 하고 평점을 매겨서 순번대로 공천을 하고요, 아래로부터 올라온 의견을 총회라든가 정당 내 결정에 반영하는 게 기본원칙이에요.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엔 당론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당원이 참여해서 올라온 의견인지 정당에 계신 분들도 아마 확신하지 못할 거예요. 선출된 사람은 처음부터 직접적인 시민의견과 상충되면 안 되는 거죠. 그걸 대변하려고 선출된 사람이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올라온 정당의 의견과 그 분야에 관한 시민들의 의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게 책임이고요.
모심: 그렇다면 한 가지 더 토론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여를 해야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거든요. 예를 들어 300명 참여해서 그걸 직접 참여라고 할 수 있는가.
이진순: 저는 숫자나 규모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뭐든 처음에 시스템을 만들면 먼저 참여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죠. 그러나 한 번 하고 문을 닫은 게 아니라 이후에도 거기에 제안하거나 입법 발의 하거나 정보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항상적인 체제로 만들어놨고 그러면서 참여자들은 점점 더 늘어났어요. 바르셀로나 시정부가 처음 들어설 때는 시정책 결정에 참여한 시민이 5천여 명이었어요. 1주년 될 때쯤 시민참여국에서 일하는 분을 만났는데, 1년 동안 사용자가 4만여 명이고 그중에 7천여 건의 시민제안이 채택되었다는 통계가 있더라고요. 그런 발전 형태를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고요. 처음에 수천 명이다가 수백, 수십 명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수만, 수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차이가 뭘까, 저는 공개적이고 책임 있는 반응이라고 봐요. 내가 뭐라고 말하니까 액션이 있구나, 이럴 때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하거든요.
모심: 제시된 방향이 옳더라도 한편으로 시민들은 우매하거나 지혜가 짧아서가 아니라 당장의 급한 생활 문제라든가 필요가 있어서 그런 정책들을 별로 지지하지 않는 경우도 있잖아요. 기후변화 같은 문제도 그렇고요.
이진순: 저희가 얘기하는 집단지성은 다수결과 달라요. 다수결의 원칙이 마치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것처럼, 다수 의견이 정답이 되고 나머지는 다 사표가 돼버리는 방식이 요즘처럼 다양한 사회문제와 이해관계가 맞물린 상황에서는 최선의 솔루션이 아니라고 봐요. 단순한 다수결과 집단지성의 차이는 서로 다른 의견들끼리 얼마나 근거를 가지고 충분한 논쟁이 이루어지는가. 그 과정에 전문가나 그 분야에 좀 더 많은 경험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의 주장이 충분히 개진돼야 하고 그래서 양쪽 의견을 왔다 갔다 하다가 내가 맞는 것 같다고 보는 그 방식으로, 투표를 하더라도 단순 다수가 아니라 계속 질문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합의의 수준들을 높여가거든요. 예를 들면 “자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했을 때 “6대 4로 짬뽕이 이겼으니까 짬뽕 먹읍시다”가 아니라, “이번에는 짬뽕을 먹고 다음에 주문하게 되면 자장면을 시키는 데 찬성하시는 분, 반대하시는 분?” 이렇게 두 번째 질문이 나가는 거죠. 협상과 합의가 가능한 질문으로 재차 묻고 그 과정에서 찬성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계속 늘려나가는 건데, 이렇게 가장 합리적인 타협안과 절충안,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집단적 동의과정을 조직해나가는 것이 중요해요. 아까 말씀드린 충분한 정보의 공유와 공개적인 논쟁이 필요한 거죠.
모심: 여전히 오프라인의 면대면 만남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아요.
이진순: 면대면으로 만나서 얘기하는 게 효과적인 경우도 있지만 온라인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때 보완되는 측면이 있어요. 저도 어디 가면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더군다나 우리 회사 내에서는 당연히 제가 대표이고 나이도 제일 많으니까 대충 나한테 동의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근데 온라인으로 한 명씩 자기 의견들을 펼쳐놓게 하면 조금씩 다른 포인트가 나와요.
어떤 때는 정보 자체가 우회해서 오거나 말을 잘못 알아들어서 이견이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 해명할 수도 있고 조율도 가능하거든요. 말없이 나한테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확인하고 그들이 좀 더 주체적으로 결정 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해야 참여한 사람들이 훨씬 더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 이후의 실행을 보장하는데, 그렇지 않고 마지못해 따라온 경우에는 그 다음 활동이 되게 어려워지잖아요. 그래서 작은 단위에서부터 그런 훈련이나 연습이 중요하죠.
모심: 그게 쉽지만은 않을 텐데, 걸림돌은 뭐가 있을까요?
이진순: 우리가 안 해봤다는 거? 연습이 필요하다는 거죠. 제 딸래미가 중학생인데 학급회의를 안 하더라고요. 우리가 형식적으로 ‘했다’는 기록만 남기는 회의나 이미 정해진 정답을 가지고 하는 회의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즐겁게 같이 뭔가를 토론하고 이견을 조정하고 합의하고 이후에 그걸 같이 지키기로 약속하는 수평적인 논의나 의사결정을 별로 해본 적이 없죠. 그리고 제 연배 사람들은 지금까지 별 문제없이 민주적으로 했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근데 그 아래 연배에 있는 분들한테 물어보면 또 달라요. 의사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 본인들은 그 의사결정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잘 몰라요.
모심: 보통 협동조합은 기업과 비교해서 민주적이라고 얘기하는데, 그 안에도 정보와 경험의 비대칭이나 민주적인 의사결정 훈련의 부족 같은 여러 문제들이 있어서 어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진순: 그렇겠네요. 저희가 조사했던 해외 새로운 형태의 시민운동은, 정당만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훨씬 더 당사자 운동의 형태에 맞게 대리자의 역할은 최소화 하고 누구나가 누구나 스탭 역할을 하는 방식으로 하더라고요. 바르셀로나 시장을 배출한 PAH(주택대출을 못 갚아 집을 압류당한 사람들의 모임)나 포데모스(스페인의 신생정당)에서도 대부분 자원봉사로, 퇴근 후에 와서 즐겁게 참여하면서 당직자로서 일하거든요.
모심: 그렇게 참여할 수 있는 동력이 뭘까요?
이진순: 자기 지역의 일과 자기 이해관계가 달린 일들까지도 거기서 결정해서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인 것 같아요. 지역별 위원회와 주제별 위원회가 종횡으로 연결돼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분과에 들어가서 의견 개진을 할 수 있고, 그러한 의사결정이 실제 국회의원들을 움직이게 하는 주요한 루트가 된다면 사람들의 참가방식은 훨씬 더 적극적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젊은 세대가 사회변화를 추동할 수 있도록
모심: 와글은 아직 평가하기는 좀 이를 것 같지만 그래도 1년을 돌아보시고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진순: 저희가 조사해서 발표한 게 최근 5~6년간의 사례들이에요. 그런데 국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언론이나 학계에서 이런 최근 동향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1년의 성과라면 세계금융위기 이후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기존 정치 지형에 파열을 내는 새로운 실험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소개했다는 점, 뭔가 생각할 ‘꺼리’로 내놓았다는 점은 나름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는 것이고요. 문제는 그래서, 한국에서는 뭘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게 과제죠.
모심: 많이들 물어볼 거 같아요. 아직 고민 중이신가요?
이진순: 그건 저희가 고민할 건 아니고 더 고민을 하시라고 계속 얘기하고 다니는 거죠. 지금부터, 아래서부터 하세요. 보통 정치가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돼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들이 없어요. 그런데 협동조합운동이든가 사회적경제, 소셜벤처 영역, 마을만들기 같은 각각의 건전한 새로운 시민운동의 흐름으로 나타난 이 그룹들이 조금 아쉬운 게 각자의 자기 완결성을 너무 강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요. 생태운동, 공동육아 열심히 해도 딴 데서 핵발전소 터지면 한번에 무너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국가적 단위 혹은 더 넓은 글로벌 단위에서 우리 일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큰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목소리를 어떻게 낼 것이냐에 대해서도 같이 가야겠죠. 과거 특권층의 커넥션에서 자유로운 세력들이 어떻게 하면 좀 더 넓게 네트워킹 해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제도화 할 건지 같이 고민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어떤 인물이, 혹은 어떤 정당이 집권하면’ 하는 식의 사고를 좀 벗어났으면 좋겠고, 어떻게 정치하는 정당인가,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의견을 조직하는 리더인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모심: 시민사회나 사회적경제 쪽에서는 지역에서부터 작게 고민하고 시작했는데, 조직화하고 세력화하는 데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네요.
이진순: 단순히 아래로부터 몇 군데 지역이 합쳐졌다고 해서 그게 기성 정치 세력과 차별성을 가지는 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각각 지역단위 혹은 분야별 그룹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작동되는 유기체라서 이게 합쳐지는 방식 역시 상향식으로, 하나씩 합쳐질 때마다 더 나은 시너지로 그 질이 변해야 하는 거죠.
늘 봐왔던 방식이 A당과 B당이 통합하면서 당직자 비율을 나누고 그 안에서 권력을 재분배 하는 건데요, 작은 풀뿌리 조직들이 연합할 때는 통합되거나 흡수되는 게 아니라 각각이 있고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이 재편되는 거예요. 지역별 모임에 예를 들면 한살림과 녹색당과 정의당과 어머니연합이 같이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한살림에서 나올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공존과 다양성이 보장되되, 조직 원칙으로 공개적이고 투명한 직접 민주주의적 원칙을 합의한다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 과정에서 직접 민주주의적 방식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좋은 제도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그룹이 수평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모심: 개인적으로 서울인권헌장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동성애 부분에 합의하지 못하고 파행으로 끝났어요. 토론이 아닌 매번 싸움이 일어났었고 그걸 보면서 시민이 과연 합리적인가 의심을 갖게 됐어요. 합리적인 시민이라는 게 없다면 시스템이 아무리 발전한들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이진순: 저는 시민 개개인이 그렇게 매번 합리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사람들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과 소통하면서 진화해나가야 되는데 문제는 특정 이슈에 관해서는 그런 식의 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고하다거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거잖아요. 아쉽긴 하지만 예를 들어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압도적 다수가 그렇게 생각해서 도저히 관철이 안 된다면 그게 우리 시대의 주소죠. 문제는 그 자체가 이슈화 됐다는 걸 사람들이 주지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서서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원래 민주주의라는 건 완벽한 솔루션을 찾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때그때 시민의 인식이나 당대의 수준에 따라서 가끔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고 보는데,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면 오류가 있을 때 그 오류의 기간과 파장을 최소화하고 빨리 복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거죠.
모심: 마지막으로, 와글에서 하고자 하는 목표도 있겠지만 혹시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인생의 목표 같은 게 있으신가요?
이진순: 일단은 2020년에 와글 대표직을 사임하는 게 목표예요.(웃음) 개인적으로는 젊은 세대들이 과거에 86세대가 했던 거보다 더 빨리 잘 제대로 된 사회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서포트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조금 더 가진 경험이나 능력이 있다면 빨리 전수해주고 그래서 젊은 세대가 빨리 전면에서 진두지휘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는 원래 있던 관념을 깨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이분들은 굉장히 빨리 받아들이거든요. 그런 세대가 사회변화를 추동할 수 있도록 바뀔 필요가 있는 것 같고요. 시민사회단체에 계신 분들도 정년을 두고 나이가 되면 빨리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웃음)
좋은 뜻을 가진 시민운동조직도 설립자 당대만큼 혁신적이긴 어려운 것 같아요. 1세대 이후에 운영을 맡는 사람들은 늘 1세대가 해놓은 자산을 잘 유지해나가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쉽사리 어떤 리스크를 감당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되면 경직되고 새로운 시도를 점점 못 하거든요. 더군다나 지금처럼 환경이 빨리 바뀌는데 5년 후를 내다보기도 어렵잖아요. 지금은 그런 정도를 생각하고 있어요.
모심: 네, 바쁘신 중에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와글> 연구원들과 함께
인터뷰 일자 : 2016년 9월 19일
인터뷰 장소 : 와글 사무실 (서울 성수동)
면담자 : 하만조(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김현(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구술자 : 이진순(와글 대표)
정리 :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