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중독에서 벗어나 함께 잘 사는 살림의 경제로
고려대 경영학부 강수돌 교수
4살인 아이와 서점엘 갔다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2세’라고 딱지 붙은 ‘한글’, ‘수학’, ‘색칠’ 책들이 버젓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나 아이 친구들이 그 나이 때를 떠올려보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 간신히 엄마 아빠만 말하는 아이가 어떻게 한글을 배울까? 당장 보름만 지나면 2살인 둘째는 아직 목도 못 가누는데 어떻게 크레파스를 쥐고 색칠을 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전시돼 있으니 누군가 그걸 사서 이용하겠지? 혹시 어릴 때부터 미리 한글을 봐두면 학습능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이란 것이 작용하지 않을까? 결국 책을 구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만으로도 ‘남들 다 하는데 넌 왜 안해?’라는 메시지 전달에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최소한 남들과 동등하게 출발하고 싶다는 기회의 평등 욕구는 사회가 만들어낸 ‘바람직한 모델’과 결합되면서 이른바 ‘국민’표 물건들을 사 모으는 동력이 된다. 기저귀 물티슈부터 시작해 특정 브랜드 장난감과 옷가지들로 긴 목록이 작성된다. 종국적으로는 국민들이 염원하는 특정 대학과 기업이라는 목표로 나아간다. 자리가 몇 개 안되는 그 지점에 도달하는 것은 소수고 다수는 실패한다. 소수는 다시 소수끼리, 다수는 다수대로 경쟁이 새롭게 펼쳐진다. 처음엔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나중에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온삶을 규정한다.
왜 그런 것일까?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는 강수돌 교수는 우리 사회가 ‘중독’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렇다면 중독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을까?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전환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공멸이 아닌 공생을 위해서는 무엇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일까? 일찍부터 이 분야에서 깊이 있는 저술과 폭넓은 활동을 펼쳐온 강 교수로부터 희망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찾아보려 한다.
일을 할수록 행복하지 않다
모심: 왜 노사 관계를 전공하게 되셨나요?
강수돌: 저는 주로 노사관계, 노동시장, 노동법, 인간관계 이런 걸 가르쳐요. 경영학의 가장 기본 베이스 네 가지는 생산, 마케팅, 재무관리, 인사관리예요. 여기서 생산과 판매가 기본인데 거기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원이 돈과 사람이잖아요. 이 중에서 사람의 영역을 제가 공부하게 된 이유는 ‘사람이 기본 구조의 일부분인 동시에 전부다’라는 생각에서예요. 다른 세 가지 영역도 사람이 일을 해야 생기는 거고요. 일하는 이유 자체도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 생각으로 사람 쪽의 분야를 공부하다 보니 일하는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데 도구화되고 심하게 말하면 기계의 일부분처럼 여겨지는 노동 소외가 일어나죠. 그 문제를 연구하면서 노사관계를 주전공으로 하게 됐어요.
모심: 저희도 살림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살림의 경제학이 무엇인지 조금 더 설명해 주세요.
강수돌: 사실 노동 과정에서 삶의 토대가 파괴되었죠. 삶의 질도, 자연 생태계도 파괴되었잖아요. 과연 파이를 크게 만들면, 또 그것을 공정하게만 나누어 먹으면 행복할까? 공정한 분배라는 차원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내가 소외되고 삶의 질이 저하되고 또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면서까지 돈 많이 벌어서 공정하게 나누어 먹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파이의 크기와 파이의 분배를 넘어 파이의 원천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고의 종합판이 2009년도에 낸 『살림의 경제학』에 나타나 있어요.
2006년에 경기 파주에서 세계생명문화포럼이 열렸어요. 그 때 김지하 선생도 처음 만났는데, 살림의 경제학이라는 말을 쓰게 된 건 김지하 선생이 쓴 『살림』이라는 책의 영향을 받아서예요. 그 책을 보고 ‘맞아. 지금의 경제나 경영이 죽임의 경제, 죽임의 경영이지만 이제 파이의 원천을 살리는 경제, 경영이 되어야 된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오늘도 학생들에게 “돈벌이 경제학·경영학이 아니라 살림살이 경제·경영학이 필요하다”고 말했죠. 어쨌든 저는 그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기업 안에서의 사람 문제를 연구하고 있어요. 사람이 즐겁게 일하고 행복하게 살 방법을 기업 안에서도, 밖에서도 찾아야 해요. 범위를 전 세계로 넓혀야 해요. 한국 기업이 성공하려고 제3세계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고려대학교 강수돌 교수
모심: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살림의 경제는 어떤 모습인가요? 조금 큰 그림을 그려 본다면…
강수돌: 우선은 개인이 스스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어떤 지역 사회나 마을에 속해 뿌리를 내리고 살면 좋겠어요. 사회 구조적인 차원에서는 유기농 농민을 살려야 하고 그 다음에 개성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해요.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 개혁이 이뤄지고 주거·교육·의료·토지·노후 문제를 사회 공공성 차원에서 해결하는 복지 시스템도 갖춰야 해요. 농업, 노동, 복지, 교육 이 네 가지가 주춧돌처럼 딱 바로잡혀야 우리 사회 경제시스템이라는 집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속가능하다는 게 제 이론적 틀이에요.
모심: 인간이 소외되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인공지능의 빠른 발전에 따라 인간이 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해서 인간의 노동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많은데 인공지능과 노동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강수돌: <인물과 사상> 9월호에 그것과 관련해 꽤 긴 글을 썼는데, 지금 이야기한 연장선에서 말할 수 있어요. 기술은 그 자체로 생산력이면서 생산 관계를 내포하고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보다도 기술이 발명되고 적용되는 사회적 맥락이에요. 그 맥락이 민주적으로 잘 구현되고 인간적 필요의 충족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되면 노동 시간도 단축되고 삶의 질도 높아지지만, 자본이나 권력의 필요대로 이윤 추구에 쓰이면 노동력이 줄어들고 기계가 대체하는 방향으로 흐르겠죠.
모심: 기술이 민주적으로 구현된다는 말씀을 조금 더 풀어주시겠어요?
강수돌: 두 가지 일화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중국 황산이나 동남아시아에 가면 높은 산에 올라갈 때 짐꾼들이 짐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어요. 얼마 전에 황산을 다녀오신 분이 자기들은 편하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짐꾼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는 게 마음이 아파서 물어봤대요. 그런데 당국이 기계화를 못 하게 했다는 거에요. 기계화를 하면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일부러 저렇게 한다고 했대요. 그 답변이 좀 애매하기는 해요. 일자리를 준다는 명분으로 누군가는 편하게 관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게 옳을까? 그런 고민이 되지만 그게 반쪽짜리 진실은 될 것 같아요. 일자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기계화를 덜 하겠다는 발상 또한 진실의 절반을 이루고 있잖아요, 과감하게 사람을 안 쓰게 되는 것보다는 일자리가 있는 게 낫다는 생각이죠.
두 번째 일화는 제주 해녀 이야기입니다. 해녀들이 별다른 도구 없이 그냥 공기 중에 산소를 흡입하고 들어가서 한 3분 내외의 시간 안에 해산물을 채취해서 올라오고 또 ‘휘이~’ 하고 숨 들이마시고 내려가요. 그때 들리는 휘파람 소리가 굉장한 관광거리예요. 어느 추운 겨울에 그렇게 물질하는 모습을 호기심으로 지켜본 어느 외국인 관광객이 “아주머니, 왜 그렇게 해요? 장비를 갖추고 산소통 매고 들어가면 열 배나 더 많이 채취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대요. 그러자 해녀가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 아홉 명의 내 친구들이 먹고 살기 곤란해진다”라고 했대요. 감동적이죠. 우리에겐 중국 이야기보다 제주 해녀 이야기가 훨씬 편안하게 다가와요. 중국 이야기는 약간 고통스럽잖아요.
모심: 효율성이 다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강수돌: 그렇죠. 두 일화에서 전하는 맥락은 동일해요. 효율을 추구할 필요는 있지만 그 효율성이 인간성과 생태성이라는 두 축과 함께 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이 세 가지가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하거든요. 이걸 삼발이나 삼각대라 생각하면, 균형을 잘 잡아야 삼각대가 바로 설 수 있잖아요. 인간과 자연의 차원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상태로 효율성만 추구하면 오래 못 간다는 걸 우리가 피부로도 느끼고 있죠. 지금 세계 경제 어려움도 결국은 그렇게 해서 온 거예요.
모심: 세계 경제가 어느 정도로 어렵나요?
강수돌: 경제가 정체했어요. 범지구적 정체, 캐나다 요크대학의 데이비드 맥낼리 교수는 이를 ‘글로벌 슬럼프’라고 하죠. 언론이나 사람들이 말은 잘 안 해도 위기예요. 구체적 지표로 30대 재벌이 700조 넘는 돈을 쌓아 놓고 있는 거예요. 돈이 좋아서 구경하려고 쌓아 놓은 게 아니라 투자를 못 하는 거죠. 본전을 못 건지니까. 이제 이윤이 안 나오는 지경까지 와 버린 거예요.
왜? 그동안은 상품으로 시장을 다 채웠는데 이제 더 팔아먹을 공간이 없어요. 돈이 안 돼요. 더구나 지하수와 공기가 오염되고 자원이 고갈되어 가니까 단가가 갈수록 더 비싸지게 되고 이윤 추구의 원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단계까지 와버린 거예요. 그리고 효율성을 찾아 생산성만 늘리다 보니 이제는 잠만 자고 일어나면 상품들이 산더미 같이 쌓이잖아요. 자동차고 옷이고 가방이고 휴대폰이고 산더미같이 쌓이는데 원가 절감한다고 인건비를 줄이고 사람을 줄이니까 전체 사회에서 구매력은 줄어버렸어요. 생산성은 높은데 구매력은 낮아지고 그 차이가 커져서 전체 시장이 안 돌아가요. 자가당착에 빠진 거죠.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인데 공멸의 길로
모심: 말씀하신 삼발이처럼 균형이 맞으면 좋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가는 경쟁에서 도태될 것 같아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간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어요.
강수돌: 지금 자가당착에 빠진 거죠. 하지만 ‘나만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계속 달리다 보면 어떤 결과가 올까요? 지난 50년 동안 교육이 어땠어요? 저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선배나 선생님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얘들아,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고2 때까지는 좀 놀아도 돼. 고2 겨울방학부터 1년간 죽어라고 공부하면 너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어.” 대체로 그랬어요. 저는 1년이 더 필요해서 재수까지 했지만요, 하하. 뭐 대체로 다들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한 10년쯤 지나니까 후배들에게는 이렇게 말들을 해요. “얘들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열심히 하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 그리고 이제는 어때요? 요즘 애들에게는 언제부터 열심히 하라고 해요? 초등학교나 유치원. 심하면 태아 때부터. 태교 영어교실도 있지요.
모심: 불과 몇십 년 전에 비해 너무나 많이 변했네요.
강수돌: 그렇죠. 지난 50년 동안 나 혼자 느긋하게 살면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하고 경쟁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유아 때부터 불행지수가 높고 행복지수가 낮아진 거죠. 지금 한국 청소년 불행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나라 중에 최고를 달리잖아요. 자살률도 그렇고.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무려 50개 넘는 항목들에서 삶의 질이 꼴찌에요. 결국 나만 손해 보기 싫어서 나름 열심히는 했는데 모두 공멸하는 과정이 된다는 거죠.
한살림은 그러지 않으려고 만든 대안 아니에요? 우리집도 한살림 조합원이죠. 제가 한살림과 같은 대안적 경제 활동이나 대안학교에 대해 강조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해요. 그거 중산층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고, 중산층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그 부분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처음에는 중산층이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라면 처음엔 욕을 좀 먹더라도 일관되게 해야 된다고. 그렇잖아요? 공교육이 좋다며 무조건 박수만 치면 이런 입시교육이 아이들을 다 죽이면서 공멸하는 게 되잖아요. ‘살리는’ 교육을 해야죠. 그렇게 대안학교들이 10년 이상 노력하다 보니, 그 신선한 충격과 혁신적 효과가 공립혁신학교로 나타나고 있죠.
모심: 욕을 먹더라도 한다고요?
강수돌: 처음에는 욕을 먹더라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예요. 하는 사람이 제대로 해야 나중에 빛을 봐요. 세상을 살리는 일이 다 그런 것 같아요. 처음에 욕 안 먹고 세상을 살리는 거는 없어요. 그죠? 대체로 좋은 일은 오히려 처음에 욕먹어요.
한살림도 중산층을 넘어서서 회원들이 많아지면 오히려 단가가 내려갈 수 있겠죠. 유기농 농민들도 단가를 맞출 수가 있고요. 재벌을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적정한 규모의 경제는 추구해야 하죠. 잘 굴러가기 위해서 적정 기술, 적정 속도, 적정 규모, 적정 수입이 필요하잖아요. 그게 무한한 탐욕으로 가는 걸 항상 경계해야 하지만 그 적정 수준을 찾는 게 모두의 모토가 되어야죠.
저항은 한 목소리, 대안은 다양하게
모심: 적정 수준을 유지하라고 하지만 지금 한국이나 일본의 젊은 세대에서는 그런 경쟁조차 하지 않겠다며 아예 탈주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일본의 사토리 세대(さとり世代,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태어나 돈벌이나 출세에 관심 없는 젊은이들을 이르는 말,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라는 뜻의 일본어로, 사토리 세대는 마치 득도한 것처럼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젊은 세대를 말한다)는 아예 해외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요.
강수돌: 저는 그것도 하나의 저항이라고 바라보고 있어요. 대안적 시도들이 모두 한살림이나 대안학교처럼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토리세대가 하는 것 같은 그런 개별적 저항의 시도들이 언젠가 새로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어요. 기존에 해 온 대안을 그들이 체험해 보고 공감하면서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자기들끼리의 독자적이고 기상천외한 대안을 만들어 갈 수도 있어요. 핵심은 주된 흐름이 나타내는 병적인 경향성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는 거죠. 비폭력 불복종운동, 크게 보면 그것과 같아요.
모심: 아, 비폭력 불복종운동.
강수돌: 그렇죠. 비폭력 불복종이잖아요. 이전엔 군대 안 가는 친구들이 감옥에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요즘은 여론이 상당히 많이 형성되어서 약간 우호적으로 변했죠. 대체복무제도도 논의 중이고 심지어 여당 사람이 모병제 주장도 하고요. 처음 하는 사람들은 욕먹고 심하면 감옥에도 가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저항의 내용이 틀린 게 아니거든요.
저항의 형태는 정말 다양할 수밖에 없어요. “One no, many yeses”, 이런 구호가 있어요. 권력이나 자본의 이윤추구에 대해서는 이구동성으로 하나가 되어 “안 돼(one no)”를 외쳐야 되지만 그것에 대한 대안을 개발할 때는 “다양한 것도 괜찮아(many yeses)”라고 외쳐야 한다는 거죠. 수많은 창조적 대안들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열어둘 필요가 있어요.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서도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냥 재미있게 즐겁게 꾸준히 걸어가면 동의하는 사람들이 저절로 붙을 거예요. 내 공부 방식도 그래요. 왜 나처럼 안 하느냐고 굳이 억지로 외칠 필요가 없어요. 설사 그 과정이 좀 힘들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꾸준히 밀고 나가는 거죠.
모심: 기존의 노동이나 교육 방식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고 일부는 비폭력 저항이나 탈주의 형태를 보인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방향에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례가 더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강수돌: 현재 구조 안에서 내부적으로 저항하거나 대안을 만들어가는 움직임들이 있죠. 교육 영역에서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참교육 운동과 참교육학부모연대에서 부모들이 연대하고 단결하는 것, 또 ‘동화읽는어른모임’과 공동육아 등이 다 대안이죠. 그리고 알바연대 알바노조, 희망연대노조처럼 기존 노조의 관료화 문제를 내부에서 치고 나오는 그런 운동도 있고요. 지금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인터뷰하는 여러 훌륭하신 분들과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최근에 새롭게 많이 나오는 다양한 콜라보 운동들도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모심: 사회가 변화하면서 새로운 모습도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강수돌: 네. 이제 그런 움직임들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공유운동도 제법 활발히 일어나죠. 최근에 여러 사람들이 한 공간을 빌려서 같이 쓰기도 하고 또 공동으로 옷도 나누고 있죠. 학생들이 양복을 보통 일 년에 몇 번이나 입을까요? 그런 거 굳이 사지 않고 서로 빌려 입고. 비슷한 맥락에서 오픈소스운동 같이 소프트웨어 등을 나누는 그런 움직임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이윤 추구와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가 인간성에 반하고 생태성에 반하니까 고통스럽잖아요. 그 고통에 눈감는 사람은 순종하고 복종하는 거죠. 돈 많이 받으면 좋은 거 아니냐고, 지금 느끼는 여러 문제들은 나중에 해결해도 된다면서 자기를 기만하죠. 그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튀어나가는 것 같지만 결국 나중에 모든 게 본질로 다가가게 되어 있어요, 사필귀정이죠.
모심: 그런 운동 흐름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고민은 주로 지속가능성 문제인 것 같아요. 좋은 가치를 가지고 실험적인 일을 하지만 생존력 있는 모델을 만들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강수돌: 어렵더라도 스스로, 또 부단히 만들어야 하죠. 창의적인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해서 자꾸 여러 시도를 해야죠.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가 정말 어렵잖아요?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워도 또 어떤 이들은 잘 해내기도 하잖아요.
모심: 어떻게 잘 해 나갈 수 있을까요?
강수돌: 우선 계획을 잘 세우는 것도 중요해요. 한 사회가 살림살이를 잘해 나가는 데 필요한 집과 학교와 병원이 있고 또 옷이나 가방의 생산량이 있고 이렇게 일 년 살림살이에 필요한 양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일반 예산 짜듯이 ‘노동 예산’도 짤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총 노동량이 어느 정도 나올 테죠. 식량까지 포함해서 오천만 인구가 먹고 살기 위한 노동 총량이 나오죠. 근데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3% 이하로 내려갈 정도로 위험해지는 것을 보면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전혀 이런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모심: 개인보다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강수돌: 마치 정부는 재벌만 도와주면 해답이 나올 것처럼 하는데 그게 아니죠.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 총량에 대해 예산 계획을 세우고 지금 시점에서 이 정도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몇 명이 어떻게 역할을 나눌지 계획을 짜는 거예요. 5,000만 명 중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이 2,300만 명 정도 된다면 어떤 식으로 역할을 나눌지를 짜고 그 다음에 역할 맡는 사람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원 그대로 투입할지, 아니면 필요한 교육과 훈련의 장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되죠. 그렇게 해서 ‘올해는 8시간씩만 일하자. 앞으로 5년 뒤에는 6시간으로 단축하자. 그리고 10년 뒤에는 하루에 4시간씩만 일하는 사회를 건설하자’ 그런 게 대통령의 철학이 되어야 되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무슨 사회주의 계획 경제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모두가 제대로 잘 살기 위해선 그 정도의 계획은 필요해요. 공부할 때도 계획이 필요하듯이 살림살이 계획을 세우는 게 필요해요. 투명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논의하고 또 마을마다, 지역마다, 지자체마다 토론을 하고 공감대를 이루어 내고 시행해야 열린 민주주의가 되는 거죠.
모심: 정부 외에 다른 영역에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강수돌: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는 크게 국가 차원의 원리와 시장의 원리, 마을의 원리가 있어요. 간단하게 세 패러다임으로 나누는데 저는 당연히 마을이나 지역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국가나 시장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총체적 계산은 국가에서 하되 시장에 맡길 부분도 있어요. 예를 들면 휴대전화나 가방 생산 같은 건 시장에 맡겨도 돼요. 그러나 총량 규제는 국가에서 해야죠. 너무 많이 생산해서 쓸데없이 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국가가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하고 좀 세부적인 것은 기업에 맡기라는 거죠. 국가가 총체적 계획은 세우되 세부적인 집행은 지금 기업이 하듯이 하는 거예요. 다만 재벌구조는 해체해야죠. 그야말로 중소기업들이나 작은 자영업자들이나 청년 창업자들도 할 수 있는 걸 하고요. 나는 청년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몸에 좋은 휴대용 컵을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환경도 보호하면서 말이죠.
모심: 마을공동체에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강수돌: 마을과 국가가 협동해야 될 부분은 농사, 교육, 의료, 노후 보장 등이에요. 총체적 부분을 국가에서 감당한다면 마을 차원에서 감당할 부분도 많아요. 국가에서 해 온 일괄적 기능을 지역 공동체로 위임하고 국가는 그걸 돕는 방향으로 가는 거죠. 그렇게 세 가지 축이 같이 가는 것이니 기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획과는 전혀 다르죠.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계획을 논의하고 집행도 합의와 공감대를 이루어 낸 다음에 하는 거죠. 지금 한국은 재벌 위주 경제 시스템으로 사회가 양극화 되었고 노인 빈곤율과 청년 실업률이 높아져 있는데 이런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여기에 있다고 보고 있어요. 말하자면, 민주적 정책과 공정한 시장, 그리고 활기찬 마을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죠.
위로부터의 변화, 아래로부터의 변화
모심: 말씀하신 제도와 함께 문화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일례로 남성의 육아휴직이 법으로 뒷받침되고 있지만 실행률이 매우 낮아요. 그런 조직 문화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강수돌: 맞습니다. 한국의 조직 문화는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이고 소통이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지고 있죠. 재벌 회장이 왕이잖아요? 이사들이 벌벌 긴다면서요? 그런 식의 문화를 수평적, 민주적이고 쌍방 통행으로 바꾸는 게 과제라고 할 수 있죠. 과연 어떻게 바꿀 거냐? 두 가지 길이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위로부터,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
위로부터 바꾸려면 우선 민주적인 대통령으로 뽑고 기업의 CEO를 민주적으로 뽑거나 그런 사람으로 바꾸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해요. 위가 바뀌면 아래도 금방 바뀌잖아요? 경영학에서도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거든요. 민주적인 리더십을 펼치는 사람이 높은 위치에 가면 아래 사람이 빨리 바뀌겠죠.
모심: 아래로부터의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강수돌: 구성원 개개인이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어릴 때 성장 과정에서부터 민주적 소통을 훈련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 교육은 물론 사회단체들의 역할이 중요해요. 일상이 민주주의를 훈련하는 장이 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반장을 뽑거나 중요한 안건을 결정할 때 찬반 의견을 묻고 토론도 하는 체험을 해 보는 거죠. 의견을 절충하고 수렴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몸으로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 직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면 바람직하죠. 피라미드 질서가 아니라 둥근 원탁의 질서 안에서 수평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갖추게 되는 주체성, 또 그 주체성이 인정되는 조직 분위기가 무척 중요하죠.
모심: 한국 공교육에서는 그런 체험을 많이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강수돌: 그렇죠. 다양한 장에서 끊임없이 저항운동을 해 보는 것도 체험이에요. ‘촛불광장’에서도 유명 인사들이나 사회자들이 시위를 끌고 갈 게 아니라 장만 마련해 주고 자유 토론과 발언 시간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해요. 일례로, 토요일 오후 2시만 되면 누구나 동네 공원에 올라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좋은 이런 문화를 만들어 가면 좋겠어요. 오래 전에, 영국 어느 공원에서 그렇게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 문화를 만들고 리더십도 바꾸고 그렇게 쌍방이 맞아 들어갈 때 조직 문화가 민주적이고 개방적으로 바뀌고 또 성찰하는 문화가 되는 거죠. 또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 있잖아요. 그런 걸 덮기 위해서 우리나라 정부처럼 간첩까지 만들어 내고 온갖 조작을 하는 게 아니라 실수를 인정하고 성찰하고 토론하면서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 내는 게 건강한 조직이고 사회죠.
모심: 그런 참여라는 측면에서 조직문화를 조금 더 얘기해보면, 노사가 같이 기업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게 중요한데 대부분 기업에서 노동자를 경영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죠. 협동조합도 이 부분에선 아직 많이 부족한 느낌이구요.
강수돌: 경영진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해요. 공동 협의, 공동 결정, 공동 책임이라는 틀이 협동조합의 기본 경영 철학으로 자리를 잡아야죠. 그런 의미에서 청주의 우진교통은 좋은 모델이에요. 물론 한국 고유의 문화가 있죠. 서열이나 나이, 그 다음에 연공서열이 있고. 경력이 오래된 사람에 대한 예의는 인간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필요해요. 그러나 대안적으로 경영하려면 동료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여기고 수평적으로 함께 동참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하죠. 그게 대안적 조직 문화이죠. 그래서 경영진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되는 것이고요.
노동자들도 중요한 것은 공동으로 논의하고 결정하고 책임을 분담하는 주인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죠. 특히 대안적 협동조합일수록 더 그래야죠. 협동조합 7대 원칙 중에도 ‘교육’이 있잖아요. 늘 깨어 있어야 되고 모두가 주인이고 동시에 노동자라는 관점을 공유하는 게 정답이죠. “우리 조금 시간을 가지고 앉아서 이야기 하자”라고 권유하면서 함께 식사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고 또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을 불러서 강의를 듣거나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 나가야죠.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모심: 개별 사업장을 떠나 우리 사회도 그런 문화,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다들 일하고 집에 오면 지쳐서 힘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직장에서도 자기 일에 묻혀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구요. 어떻게 활력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강수돌: 개인도, 조직도, 사회 전체도 지금 중독에 빠져 있어요. 일 중독, 조직 중독, 사회 중독. 우리 사회 전체가 지금 경제성장 중독에 빠져 있는 거예요. 파이 크기만 늘리면 모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으로 국민총생산(GNP, Gross National Product), 국내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만 높이면 된다고들 말하죠.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한 것도 그렇지만 최근에는 파리클럽, 채권국가클럽에 가입했죠. 비록 부채가 있지만 받을 채권이 더 많기 때문에 순수한 채권국이다, 그래서 채권국 클럽에 가입 한다며 자랑하지만 사실 한국의 국가, 기업, 자영업자, 개인 부채를 모두 합치면 5,000조가 나와요. 이걸 5,000만 명으로 나누면 1인당 부채가 1억 원이에요. 이런 나라면서 채권국이랍시고 그런 데 가입하고 이러는 행태들이 다 실상을 은폐하는 거잖아요. 성장 중독증에 빠져서 속으로 병들어 있는데 겉으로 건강한 것처럼 구는 거죠. 알콜 중독자가 “나, 안 취했어. 얼마 안 마셨어. 말짱해. 운전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것과 같아요. 지금 사회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죠.
세월호 사건도 권력 중독, 이윤 중독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거죠. 이전 이명박 정부에서 규제 완화를 해서 폐선 처분해야 하는 20년짜리 노후 선박의 수명을 25~30년으로 늘린 것이나 선박 안전 검사를 소홀히 한 것이나, 사후 대응 방식도 무책임한 유체이탈 식 대응 등, 이 모든 과정들이 중독에 빠진 행위라는 거죠. 돈 중독, 권력 중독, 성장 중독, 이런 것들이 한국 사회를 질곡에 빠뜨리고 있어요.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며 속으로는 ‘이거 아닌데’ 하면서도 거듭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는 기반이 약의 힘에서 온다는 거죠. 그게 중독의 힘이죠.
모심: 그러면 그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강수돌: 일단은 우리가 중독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먼저 봐야 해요. 나와 조직과 사회가 지금 아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아픈 상태에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될지를 묻게 되죠. 알콜 중독자 치료 모임(AA, Alcoholic Anonymous)에서 하는 12단계 프로그램의 핵심은 결국 우리 안에 힘이 있다는 거예요. 극복할 힘을 찾기 위해서는, 첫째 스스로 병을 인지하는 용기가 필요하죠. 둘째는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이 병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결단이 필요해요. “살래, 죽을래?”라는 갈림길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살겠다”를 선택해야 되는 거죠. 음식도 그렇잖아요. 한살림 조합원들은 “살래”를 선택했기 때문에 다소 비싸도 유기농산물을 사는 거잖아요. 시민들에게 강의할 때마다 저는 (가계부 절약한다고 대형 마트에 가서 값싼 농산물을 사는 것보다) 한살림 같은 생협에 가입해서 적정 가격을 지불하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훨씬 절약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한살림에서 나한테 상 줘야 된다니까.(웃음)
모심: 그런 중독에서 벗어나는 일을 돕는 여러 조직 중에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경제도 포함된다고 봐요. 그런데 활동을 많이 하면 할수록 실무자들의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또 다른 영역에서 저희와 인터뷰 하신, 나름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시는 분들도 일과 생활이 잘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구요.
강수돌: 딜레마이긴 하지만 결국은 어느 정도 노력해서 활동가들이 많아지고 이러면 같이 노동시간도 줄이며 여유를 누리고 그렇게 되어야 하죠. 처음에는 다 어렵고 딜레마에 빠지죠. 저도 마찬가지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시간 단축하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저 자신은 밤늦게까지 강의하는 날이 많거든요. 그러나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매순간 깨어 있으면 어떻게든 운신할 여지를 자꾸 만들어 나갈 수 있죠. 그러나 아무 생각 없으면 끌려가다 그냥 쓰러지고 말아요. 그런 문제의식을 모두 공유하고 늘 소통과 토론을 통해 민주적으로 풀어야죠.
모심: 어떤 사람들은 일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시는데요.
강수돌: 그게 중독 상태인 거예요. 경우에 따라서는 단호함도 필요해요. 예를 들면 전화를 다 끊고 좀 쉬거나 산에 가서 심신을 치유하고 오거나 하는 시간도 필요하죠. 활동가들끼리라도 그걸 인정해 줘야 돼요. 뻗어 버리면 아무 것도 못하잖아요.
이익과 손해의 단기 관점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장기 관점으로
모심: 이번에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분들 중에 직접 사업을 경영하시는 두 분이 지금의 경영학은 도움이 안 된대요. 다른 경영학이 필요하고 지금 시대에 맞게 다시 용어를 정리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혹시 선생님도 그런 작업을 하고 계신지요?
강수돌: 지금은 개념 이전에 어떤 철학이나 공감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생각해요. 물론 개념이 나오면 더 좋죠. 저는 솔직히 제대로 들여다보진 못했는데 ‘NPO(비영리조직) 경영’ 쪽에서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기존 경제와 경영의 패러다임에선, 비용 대비 수익이 얼마인지 기준으로 분석하죠. 하지만 우리는 먼저 ‘나와 사회가 살고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이 일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필요가 있다면 해야 하죠. 비용 대비 수익성을 산출해서 이렇게 하자는 게 아니라 사회적 필요라는 차원과 그 속에서 나의 역할이나 책임감을 따지는 거죠. 어떤 필요를 느끼는데 주체적으로 내가 어떤 기여를 하고 어느 정도의 책임을 가지고 임할 것인가 하는 차원이 비용 수익 계산법을 넘어가는 거죠.
두 번째는 단기적 이익만 보는 비용 수익 계산법 대신 장기적으로 보는 것이죠. 장기적으로 보는 거는 이익이나 손해 관점이 아니라 실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예요. 왜 건강한 음식을 먹어요? 내가 사는 동안 큰 병 안 걸리고 행복하게 살려고 그렇게 하지, 우리가 영원히 살고 싶어서 먹는 건 아니에요. 살아 있는 동안 주어진 수명대로 건강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죠.
세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와 내 가족만 챙기는 삶이 아니라 나를 포함해 온 사회가 함께 살자는 거예요. 사실, 개인은 사회 없이 존재하기 어렵잖아요? 일례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공멸하겠죠. 그리고 아무런 사회적 유대감 없이 한 개인이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런 계산법으로 가자는 거죠. 물론, 사회만 강조하면 개인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개인이란 개념이 필요해요. 사회 속의 개인, 공동체를 생각하는 개인과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강조하는 건 그런 발상의 전환 정도인데 치밀하게 어떤 경영학 용어로 정립한 거는 따로 없어요.
모심: 말씀대로 어떤 전환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은데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강수돌: 신자유주의에서 개인주의화된 계산법들이 있죠. 또 사실 생협도 근원적인 한계가 있는데 그게 소비자운동이기 때문이에요. 소비자라는 게 권리 의식이고 내 돈을 내는 거에 대한 본전 의식이 있기 때문이죠. 사실, 소비자 마인드는 ‘등가법칙’이 지배하거든요. (일본의 우치다 다츠루 선생이 <하류지향>이란 책에서 말한 개념이기도 해요.) 내가 낸 값을 하는지, 낸 것보다 좀 더 많이 뽑아 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데 크게 보면 그게 착취 논리와 같거든요. 가령, 기업가가 노동력에 투자한 거보다 더 많이 뽑아내야 이윤이 나온다는 식의 등가법칙을 소비자가 관철하려는 거거든요. 그래서, 소비자의식을 넘어서서 생산과 소비를 총체적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한 거죠. 그게 ‘살림’의 관점이에요. 죽임의 관점은 생산자는 생산만 보고 이윤을 남기려고 하고, 소비자는 소비 활동을 하면서 덕을 보려고 하는 거죠. 그게 다 본전을 넘어서서 더 뽑아가려고 하는 약탈의 논리예요. 모든 사람이 약탈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으면 결과는 공멸이죠. 그러나 한살림과 같은 생협의 경우, 살림의 논리로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고 함께 살려는 입장이니까 ‘아, 내가 좀 돈을 더 드려야 우리의 생산자들께서 안심하고 생산해주지’라고 생각하죠. 완전 다른 논리잖아요.
모심: 등가법칙이 착취 논리와 같다고요?
강수돌: 네, 형식상으로는 다르지만 실질적으로는 같다고 봐야죠. 형식상으로는 등가법칙은 유통과정에서, 착취법칙은 생산과정에서 관철되지만, 실질적으로는 모두 본전을 넘어 더 많은 것을 뽑아내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봅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엔 한국에도 어느 정도 먹고 살 만 한 소비자들이 많이 생기면서 ‘소비자의식’이 강화되었어요. 어린 아이들조차 가난을 경험하지 않고 물질 풍요 시대에서 자라났어요. 엄마 따라 마트에 가면서 어릴 때부터 직접 생산하거나 생산에 참여하는 경험이 적은 상태로 돈 가지고 사는 것만 배운단 말이에요. 소비자로 상점에 가면서 소비자 권리 의식만 키워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개인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인간성에서 퇴행이 상당히 일어난 거죠. 다른 말로 하면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부터 나를 고립하고 소외하고 개인주의화하고 내 권리만 주장하고 그렇게 되는 경향을 저는 인간성 퇴행이라 보는 것이죠.
모심: 그래도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강수돌: 전반적으로 퇴행하는데 나아질 가능성을 찾는다면, 도덕이나 윤리 감정의 회복이죠. 물론 이것은 촛불광장의 시민들처럼 사회운동과 같이 가야 힘을 발휘해요. 핵심 기조는 고립된 나가 아니라 더불어 있는 존재 속에 나예요. 영성적 관점이기도 하죠. 만물의 상호 연결성, 불교적으로는 인드라망이고 기독교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을 쓰죠. 제가 영성적 관점을 말할 때는 종교적인 의미만은 아니고 학문 세계에서도 인터커넥티드니스(Interconnetness), 상호 연결된 존재 혹은 네트워크라는 말을 많이 써요. 우리는 만물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만의 이익을 보려 한다면 누군가 다른 이가 비용이나 희생을 치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게 인간성 회복이라는 거죠. 그걸 인지한 사람들이 한살림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기꺼이 농민들을 위해서 자기 것을 더 내놓을 마음을 가지는 거잖아요.
모심: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군요.
감수돌: 네. 또 지금과 같은 잘못된 경제 시스템에서 받은 상처들이 있는데 다른 말로 피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남들보다) 못 누렸어”, “실업자로 해고됐어”, “나는 저임금을 받아”, “나는 차별받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어”등등의 말을 하죠. 그런 상처를 건강하게 치유해야 해요. 그 치유는 결국 사랑에서 나와요. 사랑과 연대, 우애, 우정의 경험을 한 사람들이 비로소 다르게 살아갈 수 있잖아요.
그리고 정치적인 차원도 있어요. 행동하고 싸워서 구조를 바꾸어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죠. 경우에 따라 조합이 그럴 수 있고요. 그런 관점에서 조직이나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도덕적·정치적 차원과 좀 전에 말한 심리적 차원의 치유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되는 거죠.
모심: 네. 오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인터뷰 일자: 2016년 9월 8일 (고려대학교 강수돌 교수 연구실)
* 면담자: 김이경(모심과살림연구소 객원연구원), 하만조(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 구술자: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 정리: 하만조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중독 사회』 앤 월슨 섀프 저. 강수돌 역. 2016. 이상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