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환과 협동조합

삶의 전환과 협동조합

-‘설국열차’와 ‘꽃들에게 희망을’로 본 협동조합 이야기

주요섭 / (사)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1. 폭주하는 ‘설국열차’의 창밖을 보라

빙하기의 지구, ‘설국열차’ 사람들은 열차 밖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열차 바깥은 동토의 땅, 죽음의 세상이고 과거의 화석이기 때문입니다. 삶/생명은 오로지 폭주하는 설국열차 안에서만 유지됩니다. 뉴욕의 슬럼가보다 참혹한 꼬리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로지 앞 칸으로의 진출밖에 없습니다. 설국열차는 일직선으로만 존재하는 1차원적 세계입니다. 좌우도 없고 위아래도 없습니다. 꼬리칸에서의 굴종이냐? 머리칸으로의 진격이냐?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전쟁, 칼과 총이 동원되고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한 폭력혁명과 무자비한 폭력진압…

그런데 설국열차의 숨은 메시지는 전혀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릅니다. 탈선한 열차 밖 풍경 말입니다. 눈이 녹기 시작하고 저 멀리 산 중턱으로 흰곰이 보일 듯 말듯 지나갑니다. 바깥세상은 죽음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 송강호와 요나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목표로 했던 것은 머리칸을 장악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창밖으로 나가는 게 종국적 목적이었습니다. 폭주하는 설국열차의 창밖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자 했습니다. 대다수 꼬리칸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오로지 열차 밖에서만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무엇을 찾아서 나가려 했을까요?

문제는 열차 그 자체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꼬리칸의 잉여계급과 머리칸의 유산계급 사이 극단적인 불평등도 문제이지만, 근본적으로 열차 그 자체를 해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차의 동력은 머리칸의 엔진에서 나옵니다. 산업혁명기의 증기기관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엔진 안에서 끔찍한 유아노동까지 이루어집니다. 설국열차는 ‘산업/자본주의 문명’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설국열차의 메시지는 산업/자본주의 문명 내에서 반복되는 계급전쟁의 불가피성이 아니라 후천개벽, 그렇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있었습니다. ‘전환’입니다. 그러나 아직 답은 알 수 없습니다. 새로운 선택이 있을 뿐 그곳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입니다. 일단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다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2. 호랑 애벌레의 깨달음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어른을 위한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호랑 애벌레의 독백입니다. 호랑 애벌레는 매일 먹기만 하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 문제에 대해서 다른 애벌레들이랑 얘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전까지 호랑 애벌레가 그랬던 것처럼 먹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거대한 애벌레 기둥을 향해 꾸역꾸역 올라갑니다.

“저 꼭대기에는 뭐가 있는데?” 호랑애벌레가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답은 이런 정도일 뿐입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모두 저기에 가려고 서두르는 걸 보면 아주 멋진 곳이 있나봐. 나도 빨리 가 봐야겠어! 잘 가.“ 그리고 또 다른 애벌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저놈들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더 높이 올라갈 수 없어.“ 섬뜩합니다. 그러니 호랑애벌레도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 삶이란 원래 험난한 거야.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그때 꼭대기에서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 것도 없잖아!”

그런데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수많은 애벌레 기둥이 보입니다. 꼭대기에 오르려는 애벌레 기둥들입니다. 호랑 애벌레가 기를 쓰며 올랐던 기둥도 밑도 끝도 없이 꼭대기를 향해 ‘속도 전쟁’을 벌이는 수천 개 애벌레 기둥들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호랑 애벌레는 새삼 깨달았습니다. 높이 오르려는 본능을 그동안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비’가 답입니다. 제대로 된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큰 애벌레, 더 강한 애벌레, 더 많이 먹는 애벌레가 아니라 나비가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일등 애벌레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설국열차의 숨겨진 답이기도 합니다. 1차원적 질서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차원변화. 직선의 세계에서 면의 세계로, 면의 세계에서 3차원 공간으로의 차원변화 말입니다. 짐작할 만합니다. 돈과 성장과 속도와 규모가 아니라, 진정한 웰빙(well-being) 즉 참다운 삶과 행복 말입니다. 책을 낸 출판사는 책 소개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40년 전 1972년도에 출간되었습니다.

“짓밟거나 짓밟히는 살벌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길을 알려 주는 나비의 이야기, 아니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참 자아를 발견하는 길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이것을 이겨내게 해 주는 힘은 희망과 사랑임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작년에 EBS에서 방영된 <자본주의>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떠오릅니다. 여기 한국사회의 한 단면이 소개됩니다. 이는 복지 지표가 아닙니다. 삶과 죽음, 혹은 참 삶과 행복에 대한 지표입니다. 애벌레의 물음표가 생각납니다.

“OECD 34개국 중 빈곤율 28위”

“OECD 34개국 중 사회복지 지출 비중 33위”

“연평균 근로시간 세계 1위(2,193시간)”

“청소년 사망원인 자살 1위”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률 28.4명, 세계 1위(OECD 평균 11.2명)

“고 3학생들 행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1위 ‘돈’”

 

3. 하늘에서 본 경제

나비가 되어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세상 전체가 눈에 들어옵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의 숨겨진 얼굴이 드러납니다. 애벌레의 경제는 ‘많이 먹는 경제’였습니다. 소비경제라고 할 수 있고, 돈벌이경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를 본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전체를 본다는 위와 아래, 좌와 우를 두루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표면(表面)’과 더불어 ‘이면(裏面)’을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숨겨진 부분을 본다는 말입니다. 서양의 대안운동에서는 ‘전일적 세계관(holistic worldview)’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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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즐 핸더슨이라는 할머니 경제학자가 그린 그림입니다. 1982년에 소개된 오래된 그림입니다만, 경제의 전체상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화폐로 평가되는 GNP경제 아래에 비화폐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가사노동이나 물물교환은 생활에는 꼭 필요한 부분이지만, 공식적인 경제 통계에는 잡히지 않습니다. 더욱이 경제(economy)의 바탕이 되면서 그것을 어머니처럼 감싸고 있는 생태계(ecology)가 주는 순수증여의 혜택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물과 공기가 없이는 인간이 한시도 살 수 없는데 말입니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의 ‘상품’을 분석하면서 표면의 교환가치(화폐가치)와 더불어 이면의 사용가치에 주목했습니다만,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에도 표면이 있고 이면이 있습니다. 음양론을 빌어 말하면 ‘양(陽)의 경제’와 ‘음(陰)의 경제’가 있습니다. ‘양의 시장’과 ‘음의 시장’, 혹은 양화(陽貨)와 음화(陰貨)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음화라는 말은 EU은행 총재를 지낸 베르나르 리에테르라는 분이 만든 용어입니다.). 이를테면 ‘전일적인 경제학(holistic economy)’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모습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경제관계는 화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고팔기 ‘매매(賣買)’가 그것입니다(한자의 순서로 보면 ‘팔고사기’인데 사실 ‘팔고사기’가 맞습니다. 자급자족경제에서 남은 물품을 먼저 팔아야 자기가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사는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자급자족이 어려운 내게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을 ‘필요(needs)의 교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전에는 시장에서 돈을 번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필요의 충족’도 의미가 있지만, ‘돈벌이’가 주된 목적이 되었습니다. 팔기 위한 물품, 즉 ‘상품’이 경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때 사고파는 행위의 목적은 필요의 교환이 아니라, 상품판매를 통한 이윤 창출 즉 돈벌이입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이전의 시장은 “필요의 교환”이 중심”이었는데,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그 반대가 되어 “돈벌이”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시장의 역할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시장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의 지배와 왜곡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시장이 아니라 말입니다.(그런 점에서 ‘시장을 넘어서’라는 말은 부적절합니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의 태극 모양을 떠올려봅니다. 이 세상 살아있는 것은 모두 “음양의 역동적 균형”입니다. 이것이 생명세계의 본래 모습입니다. 물질과 정신의 역동적 균형, 남성과 여성의 역동적 균형처럼 시장은 ‘매매(팔고사기)’와 ‘호혜(주고받기/증여와 답례)’의 역동적 균형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에서는 음양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돈벌이로써의 역할(陽)이 99%가 되었습니다. 모든 존재와 인간관계가 화폐로 환원됩니다. 문화재의 가치도, 인격도, 신용도…. 끔찍한 일입니다. 생명세계에서는 균형이 깨지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요컨대 돈벌이도 중요하지만, 교환의 본래 목적 즉 필요의 충족 기능이 상실된다면 그 경제시스템은 곧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에 의해 지배된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동적 균형이 필요합니다. 생명세계는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입니다. 『자발적 진화』라는 책의 저자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생명은 보수적입니다. 성장하고 진화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보수적입니다. 씨앗을 보호하는 단단한 씨껍질처럼 말입니다. 생명은 보수적 기능과 진보적 기능의 협동적 조화와 통합이 이루어질 때에만 지속가능합니다.)

 

4. 인생을 바꾸는 협동조합

“작가이자 조각가, 사회운동가. 1972년 처음 출간된 뒤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포르투칼,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부가 팔린 『꽃들에게 희망을』의 작가이다. 국제여성운동단체인 '그레일(The Grail)'의 회원으로, 공동농장에서 14년 동안 직접 우유를 짜고 채소를 재배했다. 성경 구절을 쓰고 성가를 불렀을 뿐만 아니라, 조각가인 만큼 자신의 조각품을 판매해 그 수익금을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데 쓰기도 했다. 그레일에서 하는 국제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집트의 아흐밈에 여성 자수협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을 도왔고, 그 외에도 뉴욕에서 대리석을 조각하고 프랑스, 포르투갈에서 일하기도 했다. 콜로라도의 산에서 6개월간 영구 경작법을 배웠으며,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다. 지금은 뉴저지 주에 있는 집에서 황제나비와 식량, 소망을 키우고 있다. 이 집은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식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설립된 소규모의 환경 센터이기도 하다.”

출판사에서 소개한 『꽃들에게 희망을』의 저자 트리나 폴러스의 약력입니다. 호랑 애벌레에게 ‘나비’라는 새로운 삶이 있다는 점을 깨우쳐준 저자는 여성 사회운동가였습니다. 공동체와 협동조합은 그녀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대안적 삶을 실천하는 활동가였습니다. 할머니가 된 지금도 미국 뉴저지에 있는 환경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설국열차의 바깥을 향한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은 한국사회 여기저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힐링신드롬, 귀농귀촌, 협동조합 열풍이 그 드러난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힐링을 원합니다. 물질적 풍요도 좋지만, 마음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웃이 그립고 따뜻한 사람이 목마릅니다. 연어의 회귀처럼 고향을 향합니다. 땅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해방 후 처음으로 귀촌귀농 인구가 이촌이농 인구를 넘어섰습니다. 작은 숫자지만 물줄기가 바뀌었다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협동조합, 대세가 되었습니다. 경향각지에서 수많은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정부, 시민사회, 재계가 앞 다투어 협동조합 설립을 돕겠다고 나섭니다.

힐링, 귀농귀촌, 협동조합은 ‘삶의 전환’의 징표입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입니다. 더 이상 자본주의 경쟁시스템으로는 경제도 생활도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이미 1972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통해서, 1982년 헤이즐 핸더슨이라는 여성 경제학자의 전체를 보는 경제구조를 통해서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2013년 오늘 한국사회에서의 협동조합 신드롬도 그 씨앗과 기운이 자라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협동조합 신드롬에 대해 다시, 새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칸으로 가기 위한 협동조합이 아니라 설국열차 밖, 전혀 새로운 삶과 사회를 위한 협동조합은 불가능할까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한살림생협을 떠올려봅니다. 한살림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경쟁관계가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호혜적 관계입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계를 책임지는 관계입니다. 협동조합의 원리인 상호부조, 상부상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의 매장에서도 역시 화폐가 오고갑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돈벌이는 아닙니다. 필요의 교환입니다. 생협 매장의 감자와 양파는 마트의 ‘상품’과 겉모습은 같지만 속은 다릅니다. 소비자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입니다. 가격이 매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생산자의 마음과 땀과 수고가 숨겨져 있습니다. 소비자들에게도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매매관계 아래에는 농촌의 삼촌과 도시의 조카가 그 해 생산된 농산물을 주고받는 증여와 답례의 호혜관계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생협은 ‘영혼이 있는 협동조합’이 됩니다.

협동조합의 본령은 돈벌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ICA의 협동조합의 정의에 잘 나와 있듯이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의 충족’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식회사처럼 이윤을 추구하는 ‘돈벌이 협동조합’이 아니라, 협동의 힘으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는 ‘살림살이 협동조합’입니다.

이때 생협의 조합원은 ‘호모 이코노미(경제인간)’가 아니라, ‘호모 리시프라서티(reciprocity)’(호혜인간)가 됩니다. 천문학자이면서 불교전문가인 이시우 서울대 천문학과 명예교수는 “세계의 본질은 주고받기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본성이 바로 ‘주고받기’라는 말입니다. ‘경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협동하는 인간’입니다.(이때 협동은 같아지는 ‘협동(協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협동(協働)’입니다.) 경쟁하는 인간,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인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 아무리 커도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비 협동조합’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생활의 필요도 중요하지만, 나비의 꿈도 놓을 수 없습니다. ‘열망의 충족’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구촌 인류는 이제 사춘기를 지나 청년의 나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춘기가 지난 청년에게 탐식은 비만과 질병을 낳을 뿐입니다. 지구촌이나 한국사회나 큰 틀에서 보면, ‘애벌레의 삶’에서 ‘나비의 삶’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애벌레의 경제에서 나비경제로, 물질적 풍요에서 정신적‧사회적 풍요로의 전환 말입니다. 그야말로 전환이 희망입니다. 협동조합이 나비로의 진화를 꿈꾸는 사람들의 숲이 됩니다.

이제 협동조합은 필요의 충족의 단계를 넘어서, 열망의 실현으로 심화되고 확장됩니다. 주고받기의 내면에 있는 사랑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이웃과, 자연과 함께하고자 하는 하나됨에 대한 근원적 열망이 ‘지금 여기서’ 실현됩니다.

 

5.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있다

이제 결단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협동조합이나 자활기업, 마을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가 되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깊은 마음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

“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해.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죽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단다. 삶의 모습은 바뀌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비가 되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애벌레들과는 다르단다.“

고치의 단계가 중요합니다. 일단 고치 속에 들어가면 다시는 애벌레로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이 고치가 되면 좋겠습니다. 협동조합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관계, 활동방식, 사업방식, 노동양식 등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생성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호모 리시프라서티(호혜인간)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탄생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는 가족들처럼, 협동조합을 통해 태어나는 새로운 삶과 공동체를 설국열차의 바깥 사람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협동공동체의 선배 조합원 혹은 회원들이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끝)

 

※추신: 『꽃들에게 희망을』은 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애벌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 일까요? 꽃들에게 무슨 희망을 준단 말인가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꽃가루를 옮겨주어 꽃이 피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꽃동산(화엄세계)을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꿀을 얻기도 하지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 이타자리(利他自利)입니다. 나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되고 모두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나비가 된 애벌레는 이제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만 잘 먹고 몸집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협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