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생활’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 일정한 환경에서 어떤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이나 “물질적 측면에서 사람이 먹고 입고 쓰면서 사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사람의 “생명활동”을 줄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잠자고 쉬고 똥 싸고 하는 삶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사람의 생명활동이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왜곡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는 것으로 치자면 음식물을 섭취하고 소화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얻고 거기서 남는 것이 배설물로 오줌이나 똥으로 나옵니다. 이 과정은 하나의 순환과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환이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막혀버리게 되죠. 특히 오줌이나 똥이란 배설물이 식물을 배양하는 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쓰레기로 버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식물을 배양하는 데에는 질산, 인, 칼륨이라는 특정 원소만 인위적으로 조작한 화학비료를 사용하게 됩니다. 한편에서는 쓰고 버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명의 순환질서가 파괴되고 단절된 상태에서 자의적이고 방편적인 처방이 이루어지게 되죠. (생명의 질서 중에 하나인 순환성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루겠습니다.) 

먹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일하고 잠자는 일에도 왜곡이 일어납니다. 생명활동을 이루는 한 과정이던 일은 돈을 받고 파는 노동으로 전락합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수렵과 채취, 그리고 일부의 농사일을 통해 먹고사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었던 동남아시아 섬 지역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대규모 사탕수수나 바나나 농장이 등장하면서 농업노동자로 전락하여 이제 돈을 주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 현실을 보면 일이라는 생명활동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쉬고 잠자는 행위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뒤틀어져 버립니다. 주식시장의 예를 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본의 질서 속에서는 휴식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서울 증시가 폐장되는 시간에는 런던과 뉴욕 증시가 시작됩니다.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휴식없이 24시간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휴식해서는 안 됩니다. 

이반 일리히 같은 사람은 인간의 생활이 화폐에 의해,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 의해 어떻게 자율성을 상실하고 왜곡되어 가는가를 증거하는 많은 책을 쓴 사람입니다. <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학교라는 제도적 교육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가, <에너지와 공정>(우리말로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로 번역되었습니다)에서는 자가용이 우리의 시간과 자원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는 병원이라는 제도가 오히려 병을 양산하는 체제가 되고 있으며, <그림자 노동>에서는 여성들의 살림이 어떻게 화폐에 의해 변질되어 가는가 추적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생명운동은 생활의 영역에서 자율성을 회복하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시장이나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정되었던 삶의 영역들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고 창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식생활의 영역을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협동을 통해 재창조하는 생활협동운동도 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용행사(日用行事) 막비도야(莫非道也) 혹은 일용행사 막비시천주야(莫非侍天主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우리의 생활에 도(道) 아닌 것이 없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해월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생활이 바로 도(道)를 실천하는 장이며, 한울님과 만나는 자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수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인구에 회자되는 틱낫한 스님의 글들은 호흡에서부터 걷는 일, 설거지하는 일, 공부하는 일 등 우리의 하찮아 보이는 일상에 삶의 의미를 불어넣는 명상적 깊이를 실천하는 내용들입니다. 예전에 김지하 시인은 이것을 “일상과 혁명의 통일”, “밥과 명상의 통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혁명은 먼 미래의 결정적 시기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구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생명운동이 이루어지는 실천의 장은 바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 의해 왜곡된 생명활동, 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생명운동의 기반입니다. 따라서 생명운동에서 ‘생활’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나카무라 히사시, <공생의 사회, 생명의 경제>, 한살림, 1990 

– 이반 일리치,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형성사 

– 이반 일리치, 평화의 근원적 의미를 생각한다, <녹색평론>, 제62호, 2002년 1-2월호 

– 정수복,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 동아일보사, 2001 

– 틱낫한, <거기서 그것과 하나 되시게>, 나무심는사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