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세계를 보는 눈,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가리킵니다. 생명운동에서 세계관을 중시하는 것은 세계관이 현대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근본적인 원인이면서, 또한 세계관의 전환을 통해 기존의 역사를 개조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도 이 세계관과 같은 맥락으로 쓰입니다. 패러다임은 다양한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체계나 구조를 가리키는데, 역사의 전환기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셸러는 인류의 세계관을 기독교적, 그리스적, 자연과학적인 것 세 가지로 나누었고, 니체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세계관으로 구분합니다. 생명운동에서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생명의 세계관을 구분합니다. 현재의 세계가 기계적 세계관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진단하고, 생명의 세계관으로의 전환과 이 세계관을 근거로 한 새로운 삶의 모습과 사회 시스템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생명의 세계관을 토대로 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오늘의 세계는 모든 것을 낱개로 분할하고 도구로 생각하는 요소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요소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은 서구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구적 세계관이라고도 합니다. 

윤노빈은 생명사상의 뿌리가 되는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신생철학(新生哲學)>(1974, 제일출판사에서 첫 출판)에서 요소론적 세계관의 지배로 말미암아 인류의 정신은 명사(名詞)의 형태로 고착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사진기가 만물을 정물적(靜物的)으로 보존하듯 고정된 상태로 사물을 파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소론적 세계관은 명사적 세계관과 같은 말입니다. 명사적 세계관은 움직이는 세계로부터 움직임을 박탈함으로써 세계를 소유하며, 사유(私有)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방식,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방식은 이와 같은 고정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 명사적 세계관은 인간의 정신활동을 구속함으로써 인간성을 기계적으로 취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인간기계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줍니다. 데카르트의 동물기계론, 오늘날의 인간공학도 여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 이상의 낭비와 과잉생산, 과잉공급을 갈망하는 욕심, ‘욕망의 체계’(system der begierde)를 불러일으킵니다.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힘차게”의 올림픽 정신이 원자론, 요소론이 탄생한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상승의 욕구은 필연적으로 직선적인 발전과 진보의 환상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 생명의 세계관은 어떤 모습을 갖고 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체적인 모습은 이 <살림의 말들>을 끝까지 읽으면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윤노빈, <신생철학>, 학민사, 2003 

– 임효선, <삶의 정치사상>, 한길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