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음양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연적 성질을 음양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했습니다. 세상은 이 두 가지 성질인 음양의 생성과 투쟁, 그리고 둘 사이의 조화에 의해 움직여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음양은 한편에서는 대립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상호보완적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런 동양적 세계 이해를 바탕으로 맑시즘과 변증법을 변용한 모순론을 썼습니다. 두 극 사이의 대립과 투쟁, 그리고 이의 통일로 역사를 이해하고, 이를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조화가 아니라 대립과 투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달리 조화만을 강조하는 논리는 체제를 온존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대립과 조화는 어느 한쪽만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대립이 있어야 창조가 가능하고 조화가 있어야 평화롭습니다. 창조가 없는 평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고, 평화가 없는 창조는 극단적 악의 모습, 광기(狂氣)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대립하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라는 역설의 논리로만 파악이 가능합니다. 대립과 조화의 경계선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의 안과 밖이 그렇습니다.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까지가 밖이며,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어디까지가 생명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물질과 생명은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완결적인 고립의 모습을 갖고 있기에 그것 밖의 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드러난 질서 뒤의 숨겨진 질서 속에서 물질과 생명은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면서 세계와 교섭합니다. 관계하고 있는 것이죠. 밖의 세계(환경) 없이 고립된 물질이나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의 관계 또한 역설인 셈이지요.
얼마 전 송두율 교수가 법정 최후진술문에서 남과 북의 상생은 내 안에 타자(他者)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로 이 생각 속에 (생명의) 통일 철학이 있습니다. 대립하는 남과 북 사이에도 늘 상보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 매파가 득세하면 다른 쪽에서도 매파가 부상했고, 한쪽이 비둘기파가 권력을 잡으면 다른 쪽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양자는 대립하면서도 서로 연동(連動)합니다.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립과 배제의 논리, 나와 타자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논리가 극단에 이르면 세계를 선과 악, 천사와 악마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서구의 합리주의가 극에 이르면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나는 100% 옳고, 저 놈은 100% 그르다는 것이지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전쟁을 일으킨 부시가 내세운 논리가 그랬습니다. 미국은 절대선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나라들은 악의 축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하지만 생명 세계에서 51%, 49%의 선악은 있을 수 있지만, 100%의 선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순을 모순대로 인정해야 통일이 가능합니다. 아니, 평화로운 공존, 평화로운 창조적 상생이 가능합니다. 이 역설의 논리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서구적 논리, 합리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건과 사실들을 역설적으로, 이중적으로 파악하는 논리 훈련이 앞으로 생명문화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입니다. 남과 북, 지방과 중앙, 지역과 세계, 공동체와 시장, 정착과 유목 사이의 역설적 관계 설정 등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 김지하, 『기우뚱한 균형에 관하여』, <김지하전집2>, 실천문학사, 2002
– 김지하, <김지하의 화두>, 화남출판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