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쓰는 도(道, Tao)라는 말은 ‘길’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한자도 ‘길 道’자를 씁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길이라는 말보다 도(道)라는 말을 선호하게 되었고, 도라고 하면 뭔가 그럴 듯한, 또는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도인(道人), 도사(道師)라고 하면 깨달은 자, 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를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따라서 도라는 말은 길과 같은 근원에서 나왔지만 어떤 완성, 최종적인 결과, 세속을 초월한 상태, 이상적인 경지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道)라는 말은 멋있긴 하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분히 교훈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마저 풍깁니다. 그에 견주어 길이라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때문에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도 있고 저 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갈래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보면 논밭도 지나게 되고, 사람도 만나고 동물도 만나고 벌레도 만나게 됩니다. 또 꽃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숨결을 나누며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가 하면 길을 가다가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회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길을 잘못 들어서면 되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낯선 사람을 만날 수도 있고 친구를 만날 수도 있으며, 첫사랑의 여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또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고, 남의 집에서 음식물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흥분하게 합니다.
길에는 그렇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도(道)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는 규정된 길을 규정된 태도로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정해진 대로 따라야 하며, 가르침받은 대로, 훈육받은 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이미 도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렇게 길과 도(道)는 다릅니다. 원래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확연히 구별됩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모든 것은 흐르는 물처럼 과정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길(the way, the pathway)로 표현합니다. 아름다움의 길, 축복의 길, 지혜의 길, 신성함의 길, 균형과 조화의 길, 대지의 길, 전사의 길, 바람의 길, 변화의 길, 인생의 길, 등등. 놀랍게도 그들의 사회에는 ‘종교’란 말이 따로 없습니다. 일상의 모든 행위가 기도요 의례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시아나 서구에는 종교가 따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일상과 종교가 구분됩니다. 자연히 일상의 행위는 세속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종교적 행위가 성스러운 것 또는 신성한 것으로 숭상됩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에게 일상과 종교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종교란 오직 일상의 삶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신성함과 영적인 의미를 찾고, 자신이 먹고 입고 쓰는 모든 행위가 다른 생명에 대해 살생과 폭력과 저주가 되지 않도록 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생명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노력합니다.
또 인디언들은 사람이나 동식물, 곤충, 심지어 바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영적인 차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상과 분리된 종교를 갖고 있는 문화권에서는 종교적 행위가 일상의 행위보다 높은 곳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종교의 관념이나 체계를 가지고 다른 존재의 행위와 삶을 규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영적인 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서구의 인간중심주의의 사고가 바로 이러한 경우입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는 영적인 차등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최하층민 계급인 수드라는 영적으로 하등한 존재이기에 승려계급인 브라만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세계 역시 인간을 최고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로 서열화됩니다. 인도의 종교적 관념이 현실과 자연세계를 규정한 경우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사고 역시 성경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것이나 종교가 일상적 삶과 분리되어 현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에게 현실 위에 군림하는 종교란 매우 낯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 위에 군림하는 도(道)란 이미 일상의 길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도란 늘 변화가 있고, 관계가 있고, 사랑과 공경이 있는 삶 속에, 길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인디언들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일상의 길에서 만나고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관계는 다시 다른 존재들의 관계와 겹쳐지고 포개지면서 순환하고 발전합니다. 이것을 인디언들은 ‘원 안의 원’, 또는 ‘생명의 원’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강가에 있는 조약돌의 원은 다른 돌들의 원들과 만나고, 그 원은 다시 강물의 물방울과 만나고 산의 곡선과 만나고 나무의 잎사귀들과 만나고, 하늘의 둥근 해와 만나고 구름과 만나고 동물의 부드러운 몸의 곡선과 만나면서 확장됩니다. 그런가 하면 낮과 밤, 심지어 삶과 죽음도 하나의 원으로 이어져 순환합니다. 갓난아이는 장성해 늙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노인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마치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것처럼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관계의 확장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생명의 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모든 생명은 하나’라는 인디언들의 영적인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영적인 가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북미 인디언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연과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려면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영적 교사들은 말합니다.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내부의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청정한 의지를 유지하고, 예지의 안테나를 바투 세워야 한다고. 또 선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연못에 만드는 파문은 결국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다 그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존재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디언들이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들을 공경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도 공경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벌레보다 자신을 낮추도록 가르칩니다.
백인들은 인디언 사회에 학교가 없다고 했지만, 오히려 인디언들에게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곳의 책들은 돌들과 나뭇잎들, 풀들, 시내들, 그리고 대지의 성난 태풍과 부드러운 축복을 공유하고 있는 새들과 동물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동안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그들이 형제요 친척임을, 그리고 모든 존재가 생명의 거미집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친척들과 어른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부족과 민족의 역사와 법도를 배웠고, 자신의 몸을 준 생명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친구들과 협동하고 양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어려운 가족과 이웃에게 기꺼이 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인디언 아이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생명세계를 이해하고, 삶을 이해했습니다. 타인과 나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신과의 영적 대화를 통해 자신이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탐구했습니다. 어른들은 섣불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입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아이들이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면 기다려주었습니다. 결코 늦는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지식을 가르치려 듭니다. 이상과 목표를 주입하려 듭니다. 그것도 가슴이 없는 머리로만.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관계는 올바른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관계는 지식은 습득할 수 있을지언정 삶의 지혜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의 영적 교사 트윌라 니치가 교육은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가슴이 이어져 있다면 진실과 평화 또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현대의 교육은 성적이 부진하거나 교과과정을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낙오자나 문제아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인디언에게 낙오자란 없습니다. 문제아도 없습니다. 그들 또한 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물질에 대한 태도도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짐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은 오히려 방해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을 쌓아두고 축적하기보다는 ‘나눔’을 실천합니다. 가진 것이 넉넉하지 못할 때에도 그들은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재물을 내어놓습니다.
아마도 인디언들만큼 남에게 선물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는 선물에는 서구식의 ‘give and take’의 관념이 없습니다. 그저 필요한 사람에게, 또는 감사해서 줄 뿐입니다. 때문에 인디언 사회에서 선물은 반대급부를 지불해야 하는 부담이나 채무가 아니라 축복이며 축제가 됩니다. 한번 시작된 선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물론 아시아나 서구에도 자선이나 보시, 기부 등 나눔의 문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덕성에 의존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시스템 자체가 나눔의 문화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인디언 사회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나눔을 실천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 사회에서는 물질도 길을 따라 원의 형태로 움직이며 확장해갑니다. 마치 생명들이 길 위에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가듯이.
나눔은 사람을 가까워지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진정한 나눔은 보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눌 수 있어서 좋을 뿐입니다. 인디언들의 물질에 대한 태도가 이와 같습니다.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은 자유롭습니다. 거칠 것이 없으므로 쉬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물질은 종교와 같지요. 거기에 매이기 시작하면 삶을 규정하고 속박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변화를 거부하고 머물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곧잘 축적과 지배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길 위에서는 물질도 멈출 수 없습니다. 흐르는 바람과 물처럼. 멈추는 순간, 변화를 정지하는 순간 자연의 균형과 조화는 깨집니다.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삶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바람과 물 같은 사람들입니다. 끝없는 변화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생명세계의 원리임을, 그것이 자연의 법임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도(道)보다는 길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길에는 늘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와 축복이 있었습니다.
나바호족 하면 직물로 유명합니다. 그들이 과거에 만들었던 직물은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의 직물을 보고 기적이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입하려 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바호인들에게 직물의 최종 생산물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베레 퇼킨은 『민담의 역동성』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수지 비널리의 영화 <나바호의 직물짜는 여인들>에는 어떤 사람이 직물을 짜는 모습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종 직물이 탄생하는 과정에 단지 몇 분만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백인들에게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나바호인들이 직물을 짜는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직물 자체는 나바호인들에게 직물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온 최소한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염색의 재료를 얻기 위해 약초를 모으는 과정에서 있었던 인간과 식물의 상호작용이라든지, 익숙한 풍경을 가로질러 가는 동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 사이의 정신적 교류와 같은,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나바호 여인이 직물을 짜는 이유는 다른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직물이 완성되면 미련없이 필요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거나 필요한 생필품과 교환했습니다. 집착은 길을 가는 사람을 붙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잠시도 머물지 않습니다. 머무는 것 같아도,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끊임없이 변하고 거듭나고 새로워집니다. 삶이 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이 야생꽃 같기를
아름다움 속에서 자유롭게 자라고
매일매일 기뻐하기를
인디언 사회에 어르신과 지혜로운 자는 있어도 도사(道師)나 도인(道人)은 없습니다. 지도자는 있어도 위에 군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길 위에서는 모두가 나그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경이가 있고, 자유가 있고, 따뜻한 숨결이 있고, 나눔이 있고, 내적 발전이 있으며, 다함이 없는 생명의 순환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과 하나됨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도 아름답습니다. 실패는 또다른 길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道)에는 관념이 있고, 절대가 있고, 권위가 있고, 군림과 차별이 있습니다. 오직 성공만이 환영을 받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디언들이 5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백인들의 지배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영적인 지혜와 문화적 정체성을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거듭된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정진하며 모든 존재와 하나되는 길을 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인디언들은 모든 생명과 하나되는 고귀한 길은 돌로 쌓은 높은 신전에 있지 않고 일상의 길 위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길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적인 나를 이기는 진정한 ‘전사의 길’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서정록, 이장 2004년 5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