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넘어서기로서 지역공동체 전략과 농업?협동조합의 역할
다다 마헤슈와라난다. 2014. 『자본주의를 넘어: 프라우트 – 지역공동체, 협동조합, 경제민주주의, 그리고 영성』. 다다 칫따란잔아난다 역. 도서출판 한살림.
글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실장)
불확실성 속에 내재된 예견된 재난과 생존전략 다시 짜기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예상치 못했던 각종 사건, 사고와 그로 인한 충격의 기억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보면 무리하게 욕심냈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지고 ‘무탈함’에 감사하는 겸손함까지 생긴다. 파편화 된 정보와 기억들이 모이면 인식의 폭이 확장되고, 자주 있지는 않지만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분, 초 단위로 쫓기듯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삶은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사유 능력을 마비시켜 버린다. 문제는 분절적이고 파편화된 인식과 태도를 가지고는 갈수록 확대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내기가 점점 어렵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거대한 변화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예견된 재난의 요소들을 무기력하게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농업과 식량 문제만 해도 그렇다. 확대되는 기후변화와 예측 불가한 기상변동이 오일쇼크를 능가하는 ‘식량쇼크’ 사태를 경고하고 있지만, 매년 세계 인구가 1억 명씩 늘어나는 데 비해 농지는 한국 농토의 3배 이상씩 사라지고 있다. 게다가 세계적 경기침체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는 투기자본은 식량은 물론 농지에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다.
문제는 우리다. 2008년 글로벌 식량위기 때 농업의 역할이 잠깐 주목받긴 했으나, 막상 현실에서 곡물자급률은 계속 감소추세인데다, 농업을 교역협상과 물가조절 수단으로 다루는 정부는 우리의 주식인 쌀 시장까지 개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농(農)’의 지속불가능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은 여전히 명확치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문제의 핵심은 농업에 대한 사회 전체의 인식이 매우 파편적이고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농업 문제를 농촌에 거주하면서 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의 문제로 치부하는 한 해결책은 요원하다. 도시화율이 90%를 넘고 전체 가구에서 농가 비중이 6.3%인 상황에서 사회구성원 다수가 농업을 자신과 직결된 공동운명의 과제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예견된 재난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 소위 ‘골든타임’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국가와 기업, 가계, 개인을 포함해 모두가 생존 전략 자체를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농업 회생(回生)을 통해 외부 의존형 거품경제, 투기경제의 체질을 바꿔내고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해 나가야 할 때다.
총체적 위기에 대한 각론적 대응이 가지는 한계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내는 각종 위기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적 징후가 동시에 얽혀서 확대되고 있는 지금은 기존의 관행과 관성을 넘어선 발상의 전환과 총체적인 접근으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할 때다.
하지만 막상 현실을 돌아보면 변화를 만들어내는 비전과 전략, 주체의 역량 전반이 부족한 실정이다. 현실의 정치구조는 4-5년의 선거 주기에 매여서 장기적인 과제들을 책임 있게 다루지 못하고 있고, 지지집단의 이해관계에 둘러싸여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문제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때 사회변화를 추동해 왔던 사회운동 영역의 사정도 예전 같지는 않다. 취약한 자립기반에다 경계를 넘어선 연대와 협력도 부진한데다, 사회운동 내부의 이념 갈등이 새삼스럽게 증폭되면서 사회적 영향력과 도덕적 리더십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공론의 장을 책임 있게 열어가기보다는 편가르기의 당사자가 되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적 징후는 점점 커지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열어갈 수 있는 책임 있는 단위나 영역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들어서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가 대안의 영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까지의 모습을 놓고 보면 이런 흐름들이 총론적 위기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틈새’에서 생존을 궁리하는 데 관심이 모아져 있다. 협동조합에 대한 최근의 관심들이 일자리 창출과 사회서비스 제공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태동기와 성장기에 요구되는 협동조합과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위기 시대에 필요로 하는 협동조합은 그 위상과 역할이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각론적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비전과 노력이 필요하다.
전환의 실마리로서 영성적 의식혁명이 가지는 의미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무성하지만 현실 변화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자리하지는 못하고 있다. 누가 어디서 무엇을 가지고 언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전환을 이뤄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나 비전이 아직은 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넘어』라는 책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사점들을 주고 있다. 이 책은 ‘지역공동체’, ‘협동조합’, ‘경제민주주의’, ‘영성’을 열쇳말로 해서 전일적이고 총체적인 사회시스템을 그려내고 있다. 책의 원저 『After Capitalism』은 2003년에 나왔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경험한 후 저자가 책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해서 2012년에 새롭게 출간한 것을 2014년에 『자본주의를 넘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했다.
이 책이 가진 중요한 특징으로 책의 저자와 역자가 모두 영적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긍정적 변화를 위한 활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는 실천가이자 지식인들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책 전반을 관통하는 시대 인식과 접근 태도가 전환의 시대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안목을 제공해주고 있다.
저자는 물질중심, 자기중심적인 틀에 협소하게 갇혀 있는 사람의 마음을 확장시킴으로써 영적 가치에 기반을 둔 사회체제를 제안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몸담아 온 수행 전통에 따라 인간이 자연 및 사회 환경과 관계를 맺는 유형을 4가지로 나누고, 각각의 단계가 순환적인 형태로 변화, 발전해가는 ‘사회순환이론’을 제시한다. 이런 관점은 진화론적 발전모델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기존의 인식론과 발전모델 자체가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적지 않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면, 비교우위의 논리로 농산물 수입 개방을 정당화 하고, 비용편익 계산에 맞춰 농지 전용을 확대하고, ‘1억 농부’, ‘6차 산업’이란 수식어로 농업의 현실을 과대포장하고, 고투입을 통한 고소득 농업에서 출구를 찾는 현실의 밑바탕에는 기술과 구조의 문제 못지않게 사람들의 인식체계 자체가 관행화 된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후 ‘생명’ 보다 ‘돈’을 앞세웠던 우리사회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흐릿해지고 빠르게 퇴색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의 바탕에도 이런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넘어>라는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영성적 리더십, 영적 행동주의, 영성에 바탕을 둔 사회혁명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단계적 이행 전략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방향과 방법들을 세계 곳곳에서 펼치고 있는 실천 사례와 경험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총체적인 거시경제모델 즉 ‘프라우트 체제’를 소개하고 있다. ‘프라우트(PROUT: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는 말 그대로 ‘진보적 활용론’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이론서보다는 실천적 실용서에 가깝다. 다양한 실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 진단의 질문들, 공통의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지혜를 모아내기 위한 프로그램 기법 등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저자는 특히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 대한 전망에 그치지 않고 위기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이행 전략과 원칙을 구체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최저 생계수준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의식주와 의료, 교육, 교통 등 삶의 기본적인 필수품목을 최소 수준 이상으로 모두에게 제공해 줌으로써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균형을 회복하도록 한다. 당연히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적인 식량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보장하는 데 있어 농업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둘째,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보장 장치가 안정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수혜자들이 자존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 단순 보장을 넘어 협동조합을 통한 일자리의 제공은 중요하다.
셋째, 사회에 보다 많이 기여하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더 제공해야 한다.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평등주의는 사람의 본성과 자연의 법칙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보다 많은 능력과 성실성을 가진 사람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실질적이고 합리적인 지원을 하는 것은 개인과 사회를 보다 성숙한 단계로 끌어올리는 길이기도 하다.
농업과 협동조합에 기반한 자립과 순환의 지역공동체 모델
이 책은 또한 농업과 협동조합에 기반한 자립과 순환의 지역공동체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실천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농업, 농촌이 겪고 있는 불행은 해당 지역의 운명이 그 곳에 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외부의 힘이 지역경제를 통제하는 것과 지역에서 생산된 부가 지역 바깥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지역자립의 기반을 다지는 일은 의사결정 과정의 민주적 개방성과 분배의 형평성 차원을 넘어서 실질적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며, 바로 여기서 농업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프라우트 모델은 농업을 경제의 중심에 놓고 사회와 지역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산업부문별 노동인구 비율을 농업 분야가 20-40%, 농업과 관련된 산업분야, 구체적으로 ‘애그리코 산업’(agrico-industry)과 ‘애그로 산업’(agro-industry)에 각각 10-20%, 교역과 서비스 분야에 각각 10%, 농업을 제외한 제조업 분야에 20-30%를 설정해놓고 사회체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농업 경영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협동조합을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협동조합은 농업의 생산과 유통과정은 물론 토지소유 영역까지 포괄한다. 우리나라에서 농협이 가진 역할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체적으로 경제적 파국을 피하는 길로 지역을 협동조합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로 재구성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협동조합의 의미와 역할을 사회 전체적인 재구성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프라우트의 3단계 경제구조가 그러한데,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은 협동조합을 통해 생산해내고, 개인의 창의성을 요구하는 물품은 소규모 개인사업을 통해서, 그리고 수송, 에너지, 통신, 국방 등 기간산업 분야는 공익 목적의 공기업들을 통해 운영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다른 경제체제에 대한 전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협동조합 바람이 일자리 만들기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를 넘어>라는 다소 거대하고 추상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전환의 시대를 모색해 나가는 데 다양한 단초들을 제공해주고 있다. 다만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해당 사회의 조건과 주체로 나설 당사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다. 책에서 ‘농업’과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우리 현실에서는 농업과 협동조합이 매우 식상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기형화 된 괴물 같은 모습을 지닌 ‘농업협동조합’을 개선, 개혁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내년 3월에 전국 1,400여 개소의 조합에서 동시에 조합장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진다. 그런데 그 중요성에 비추어 사회 전체적인 관심은 매우 적다. 전환기의 진통을 극복하고 자본주의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데 있어 ‘농업’과 ‘협동조합’이 가진 시대적 의미와 역할이 새로운 시선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 농촌사회학지 『농촌사회』 제24집 2호(2014년)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