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5-16일 1박 2일에 걸쳐 전북 고창과 정읍 일대의 동학 역사 유적지에 다녀왔습니다. 모심과살림연구소, 환경사회학회, 한살림 등 23명이 일정을 함께 했고, 전북 지역의 한살림 회원과 무등산 공부방 회원들이 15일 일정을 같이 했습니다. 모처럼 날씨도 따스하고 공기도 청명하여 이번 답사는 걸어다니는 그 자체로서도 생기와 즐거움이 넘치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방문한 곳은 손화중 접주의 묘소였습니다. 보통 갑오동학혁명 하면 전봉준을 떠올리는데,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무명 용사들이 동학에 참여하여 후천개벽의 꿈을 실천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찾아간 손화중은 그 중에서도 상당히 두각을 나타낸 인물입니다. 그는 갑오년 당시 34세로 전봉준 보다도 6세나 젊었지만, 그가 거느린 포에 무려 3500명이나 속할 정도로 규모가 있었고, 그 정도로 상당한 조직가였다고 합니다.
손화중은 괴치라는 곳에 도소를 설치했는데, 주로 교육과 물자 공급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위 사진에서는 도소 터는 없고 간판만 있는데, 손화중이 이 모라는 지역의 부자를 설득하여 동학으로 끌어들인 뒤 그 집을 도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도소 터를 떠나 찾아간 곳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4천여 농민군이 모여서 포고문을 발표한 무장입니다. 이곳에서 3월 20일에 무장포고문이 발표되고 그 다음날부터 전국 차원의 봉기가 시작됐다고 합니다.
첫날 답사는 이곳에서 마무리 했습니다. 전북 지역 한살림 조합원과 무등산 공부방 분들과도 헤어졌는데, 누군가의 제안으로 조형물을 바라보고 둥글게 서서 돌면서 새야새야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의 슬픈 음색을 따라 120년 전 스러져간 동학농민군의 한스러움이 휘감는듯한 느낌이 든 것은 저만이었을까요..
저녁에는 다음날 일정을 위해 선운사 인근에 머물렀습니다. 가장 오래 됐다는 동백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늦게까지 120년 전의 동학과 오늘날 우리의 삶, 사회, 문명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눈 덕에 힘겨웠지만, 다들 일어나 선운사로 올라왔습니다. 새벽녘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선운사 경내를 지나 마애불에 도착했습니다.
이 마애불의 위치가 참 묘합니다. 마애불이 보이기 전까지 저기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딱 올라서니 마애불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뒤따라오시던 분들이 줄줄이 감탄합니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잠을 이겨낸 보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여기 온 적이 있지만 마애불은 처음 보셨다고 합니다.
마애불 배꼽이라 알려진 명치 부위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저 배꼽 안에 비록이 있는데, 3천 년 전 검당 선사라는 도승이 저작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조 5백년 후에 이 석문을 여는 자 있을 것이오, 비록이 세상에 나오는 날은 그 나라가 망할 것이요'라 한 뒤 다시 흥한다 운운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임진년(1892년) 8월에 손화중과 동학당이 저 배꼽에 숨겨진 비록을 탈취했다는 소문이 퍼져 관군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손화중 포가 동학 내의 최대 세력으로 자리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생각해보면 미신으로 치부할 일이겠지만, 당시로서는 그 설화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이죠? 이른바 '석불비결 탈취사건'이라고 합니다. 저 석벽에 새겨진 불상 하나에 설화와 120년 전의 당시가 겹쳐지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120년 후에도 또 어떤 이야기가 보태질까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마애불 앞을 떠나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려고 하니 어느새 해가 산 위로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선운사 뒤편에 핀 빨간 동백꽃도 조금씩 피고 있던데, 4월에 오면 선운사 뒤를 붉게 물들인 모습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동백 호텔을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동학혁명모의탑입니다. 요즘엔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을 것 같은데, 가만 들어보니 1969년에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면 기단부가 탑신보다 새 것인데, 어느 지자체장 분이 임의로 탑을 옮겼다가 주민들의 민원 제기에 다시 되돌려 놓으면서 새로 기단부를 설치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탑신의 측면에는 위 사진처럼 둥글게 사발통문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누가 주도자인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인데, 동학 이전에도 민초들 사이에서 사발통문이 사용됐다고 합니다. 사발통문에 쓰여진 이름은 모두 이 지역에 사셨던 분들인데, 전봉준의 친척들도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이 집에서 사발통문을 모의했다고 합니다. 사발통문에는 이름이 쓰여 있어서 자칫 발각되면 본인 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위태로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써 넣음으로서 지인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발통문이 작성되었는데, 아까 탑신에 있던 것은 그 중 하나로서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이 마을 주민이 발견해서 탑에다 새겨넣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입니다. 이번 답사 안내를 해주신 박맹수 교수님의 평가로는 이곳이 가장 제대로 된 동학 조형물입니다. 조형물의 눈높이가 사람 높이만하여 친근하고, 무명동학군 즉 민중을 기리고 있으며,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바로 밥그릇 조형이랍니다. 동학농민군이 들고 일어선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부당한 세금, 원래의 10배 20배를 거둬가서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의 세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인간 대접, 그리고 제대로 된 밥 한 번 먹어보자고 일어섰다고 합니다. 또, '밥 한 그릇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그 이치를 살펴본다면 세상 만사를 다 안다'(식일완만사지)라는 해월 선생의 말씀도 새겨볼만 합니다.
이곳은 전봉준 고택입니다. 원래 한칸이 적었는데, 그래도 전봉준 대접주, 녹두장군의 생가터인데, 너무 작다고 작업하신 분이 한 칸을 더 늘려서 복원했다고 하네요.
이어서 방문한 곳은 말목장터입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통해 과도한 물세를 징수한데 따라 수십명씩 관아에 찾아가 물세를 줄여달라고 진정했지만, 오히려 난민 취급을 받고 쫒겨나거나 투옥됐다고 합니다. 이번 답사 첫 머리에 박맹수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합법적인 노력 없이 불법적인 봉기는 없습니다' 이런저런 경로로 열심히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그 한계가 명확해지니까 봉기가 일어난 것이란 말씀…
1894년 1월 10일 밤 고부 말목장터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20리 떨어진 고부관아로 가는데, 곳곳에서 합류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나서 별 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관아를 점령했다고 합니다. 이미 1893년부터 전봉준 등 19명의 농민지도자들이 죽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모여 격문과 행동 목표를 쓴 사발통문을 통해 궐기를 준비하여 실천했다고 합니다.
만석보를 가기 전에 군자정에 들러 부러진 공덕비들을 둘러봤습니다. 공덕은 커녕 민초를 수탈하던 원님들을 위해 세운 비석이 저렇게 부러져버린 이유는 뻔하겠죠…
고부 농민봉기의 직접적 이유가 되었던 새 만석보입니다. 원래는 만석보가 있었는데 그 밑에 새로 보를 하나 더 만든거라더군요. 이 보를 만들 때 동원된 사람들에게 보수를 주지 않았고, 보를 쌓은 첫 해에 세금을 걷지 않겠다고 해놓고 수세를 걷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세금을 걷어가 민초들을 괴롭힘으로서 직접적인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처음 이겼다는 황토현 전승지에 들러 답사 일정을 모두 마무리 했습니다. 다 같이 기념사진도 찍고 비석에 새겨진 새야새야 노래를 불렀습니다. 후천개벽의 세상을 열어보고자 했던 동학농민군의 꿈은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산산히 부서져 갔지만, 이후에도 조직력이 건재한 곳을 중심으로 3.1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 갑오동학혁명은 교과서에서 민족운동, 민중운동으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삼경사상, 식일완만사지, 이천식천, 향아설위 등의 개념은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갑오동학혁명 120년을 맞이해 동학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도 동학 관련 여러 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음 행사에서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