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으로의 길’에 대한 몇 가지 단면
카츠마타 마코토(勝? 誠, 메이지학원대학 국제학부 교수)
* 일본 <아젠다 프로젝트>에서 발간하는 사회문제를 생각하는 계간지 『아젠다AGENDA – 미래를 위한 과제』 제 41호(2013년 여름)에 실린 글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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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서 ‘탈성장’이라는 단어가 주목되고 있다.
현대 일본사회에서 탈성장이란 단어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울림을 주는 이유는 매일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어떤 불안함과 그 불안함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경제성장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와 닿지 않고, 이대로 가다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시대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불안한 것은, 구체적으로는 청년들이 고등 교육기관을 졸업하고, 안심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정규직 고용을 찾지만, 언제 계약이 종료될지 알 수 없는 비정규직 고용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규직이 되었다 해도 타사와의 경쟁이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근무내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오염에 의한 내부피폭도 포함하여 아직 출구가 보이지 않고, ‘생명의 재생산’ 그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현재 생활이다. 거기에 ‘아시아 경제성장에 참여한다’는 메시지로 TPP 참가를 결정한 일본 정부의 아베노믹스라는, 주가와 선거표를 링크한 성장론이 일본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제까지 나름대로 보장해온 전국민보험제도와 식품 안전(예를 들면 유전자 조작 식품 규제) 실현을 위한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등의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일본 사회가 경제성장을 실현하면 고용이 개선되고 보다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다는 종래의 기대가 이제는 신통력을 잃고, 오히려 경제성장이라는 신앙을 떨쳐버리는 일이야말로, 폐쇄적 시대상황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적, 실천적 탈출구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발상과 기대가 확실히 생겨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탈성장’의 정의는 없다. 그것은 지금을 다시 생각하는 완만한 사고의 다발이다
그러면 「탈성장」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어떤 것일까? 필자가 아는 한, 이 단어의 명확한 정의는 없다. 오히려 앞에서 기술한 것과 같이 시대 상황에서 생겨난 새로운 사고방식 정도이지 않을까? 거기에 이 시대사상을 선점하여 너무 엄밀하게 정의해 버리면, 어느 틈엔가 학회같이 되고, 학파를 돌며 정교하고 세밀하게 되어(학문적으로는 좋지만) 보통 사람들이 알기 어렵게 돼버린다. 알기 어렵다는 것은 사회를 보다 좋게 바꿔 나가려 할 때, 활용하기 어렵게 되거나, 발전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이런 입장에서 탈성장 사상의 단면을 네 가지 정도 생각나는 대로 열거하고자 한다.
1. 탈성장은 생활의 풍요로움에 있어 양보다 질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미 일본이 고도성장을 달성한 1960년대 말, 이코노미스트 츠루시게토(都留重人, 경제학자)는 ‘거꾸러진 GNP(국민총생산)’라고 칭하며, 화폐로 계산한 한 국가의 1년 총생산 증대분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기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연재, ‘거꾸러진 GNP(1970년 9월 13일’) 특히 그는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인 미나마타병처럼 기업의 이윤 추구 활동이 주변의 주민 건강에 해를 입히고, 인간과 자연을 파괴해버리는 ‘공해’와 같은 시장경제의 마이너스 가치도, GNP를 늘리는 결과가 되었다고 하며 경제성장 신앙에 경종을 울렸다.
신선한 공기, 안전한 물과 식료품은 인간 재생산의 근본적인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고도성장을 통하여, 거꾸로 질이 악화되며, 물건이 넘쳐나는 가운데 사람들 생활의 질이 반대로 악화되는 현상이 있다. 실제로 풍요로움의 실감 또는 행복감과 소득의 증가는 반드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보고되었다.(내각부, 「헤이세이 20년판 국민생활백서」 시사화보사, 2009년) 그뿐 아니라, 보다 적은 소비로 보다 많은 생활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도 최근 들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Less is More라고도 표현되어, 물건이나 서비스를 소비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풍요로움(가지는 것, having)의 행복보다 반드시 금전적 지출을 동반하지 않고도 친한 친구와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하는 것 being’의 행복을 중시한다. 음식으로 말하면,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르는 싸고 빨리 나오는 패스트푸드보다는 스스로 시간과 품이 들어도 안심할 수 있는 소재로 만들거나, 그것들을 천천히 떠들면서 준비하거나, 먹거나 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슬로푸드 운동) 것이 탈성장적 사고방식의 하나이다.
2. 탈성장은 생활과 노동의 탈상품화를 지향한다
현재, 일본 전국에 4만 점 정도 되는 편의점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려 있고, 무엇보다도 꽤 편리하다. 종래의 식생활에서 보면 편의점은 언제라도, 소량으로 조리품을 살 수 있고, 자기가 좋은 시간에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부엌과 가족의 단란한 저녁시간을 빼앗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런 관점에 의하면, 소재를 선택하고, 스스로 만드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 한때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식생활이 돈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 안에서 점점 더 파묻혀 들어가는 이러한 상태를 다시 생각하고, 꼭 언제나 돈을 쓰지 않아도 또 벌지 않아도 풍요로운 생활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탈상품화의 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상품이라는 것은 미리 시장에서 팔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물건과 서비스를 의미하며, 인간은 시장용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품이 아니다. 경제인류학자인 칼 폴라니가 적절하게 명명한 ‘상품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시장은 존재하지만, 본래적으로 본다면 이상한 구조가 되어 있어 그 존재의 방식은 탈성장 사상가가 지금도 달라붙어 연구해야 할, 인류생존을 위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큰 문제 중 하나로 계속 남아 있다.
경제 선진국인 유럽의 현재 상황을 보고 경제성장이야말로 자신들의 미래를 풍요롭게 보장해 준다는 현대사회의 경제적 합리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한, 탈성장 사고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 철학자, 지금은 고인이 된 안드레 골츠에 의한 즐거운, 자유로운 노동의 사례를 조금 길지만 인용해두자.(1)
‘하나의 집합주택 또는 마을에 사는 주민이 자신의 빵을 빵집에서 그저 그런 가격으로 사는 대신에 그룹을 만들어 장작을 사용하는 빵 가마를 구비, 여가를 이용하여 자연제법의 빵을 구울 경우, 그 활동은 자율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빵은 임의적인 생산물이고, 이 주인은 단지 빵을 만들고, 먹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자신이 결정한 빵의 기준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즐거움을 위해서 빵을 만드는 선택을 한 것이다. 하나하나의 빵이 생산물이라기보다 창작물인 것이다. 배우고, 힘을 합쳐, 솜씨를 키워가는 기쁨이 중요한 것이고, 배를 채운다는 것은 2차적인 것이다. 빵을 만들기 위한 시간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정원이나 텃밭을 가꾸거나, 사회변혁의 운동을 하거나, 교육을 하는 시간과 같이 살아있는 시간 그 자체인 것이다. 이 활동은 그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획득능력을 갖게 됨으로서 그 자체만으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원래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노동을 경감할 수 있는 다양한 기기(1960년대에 보급률이 극적으로 확대된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등)와 서비스가 발달한 일본이나 선진 유럽 사회에서의 고찰이고, 용어의 정리와 이해를 포함하여 남녀모두 생존을 위해 하루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여러 사회에 이것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사회가 지향해야 할 일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3. 탈성장은 사람이 결국은 자연환경 안에서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우리가 지구의 자연환경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가운데, 다양한 이유를 달아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아직 멈출 수 없는 한, 현대 자본주의의 자기증식운동(More is More)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1987년 UN의 ‘환경과 개발에 관한 세계위원회’가 국제사회에 내놓은 ‘지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하여’라는 보고서[(“Our Common Future” 통칭 브룬트란트 보고)에서는 지구환경이 존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인류의 활동은 ‘미래세대 니즈 충족력을 손상시키는 일 없이, 금세기의 니즈 욕구를 충족하는 개발’을 해야 한다고 하여, 종래의 ‘경제성장’과 거의 동의어인 ‘경제개발’과는 선을 그으려고 한 개발 개념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단어에 의해 지구환경의 파괴가 멈추는 쪽으로 국제사회가 눈에 띄게 방향을 바꿨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2011년 3·11 후쿠시마 원전 폭발 재해와 그 후의 대응에서 보인 바와 같이 방사성 물질의 폐기가 해결되지 않은 채 ‘제염(除染)’이라는 말로 의미 불명의 행정용어가 사용되어 지금의 에너지 생산·소비를 전제로 한 지구환경 파괴형 에너지 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탈성장적 발상은 환경의 지속 가능성을 그린 비즈니스, 그린 자본주의, 로하스적 에코 상품의 보급이라는 단어로 실현하려고 해도 결국은 현행의 경제성장의 논리 그 자체를 뒤엎는 힘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자연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지켜온 것이 자연이기 때문에 그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연관이 있다. 바꿔 말하면 서유럽에서 시작하여 자연을 지배하려고 했던 근대문명 그 자체에 대해 되묻고, 아직 근대에 이르지 않은 도상국이라고 불리우는 남쪽 지역 사람들의 자연환경관 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말이 자주 탈성장 사상에는 등장한다.
탈성장 사상의 대표적인 논자인 세르주 라투슈의 최신작 ‘탈성장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2) 에서도 멕시코 남부에서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치아파스 원주민과의 존엄성 다툼, 에콰도르의 케추아어를 말하는 혼혈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 주도에 의한, 자연, 그 자체가 가진 권리의 승인을 명시화한 신헌법, 인도 주민의 숲 지키기를 위해 일어선 치푸코 운동 등의 사례를 들고 있다.
라투슈에 의하면 이런 움직임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방향성이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자연과 문화의 2분법을 부정하고 양자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원주민 사상 안에 있는 무언가가 엿보인다. 또 새로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서양적인 사회발전 모델의 거부와 전통적인 원주민 사회의 제반 가치의 승인은 상념의 탈식민지화로 가는 제 1단계이며, 경제 제국주의로부터 탈출하는 제일보이다. (같은 책 25페이지)
자연과 인간관계의 역전은 ‘자연이야말로 우리에게 풍요로운 선물을 보내준다’고 하는, 일본에서도 지금도 남아 있는 자연관으로, 특별히 새로운 발상은 아니지만, 서구의 합리성 추구의 근대사에 있어서는 이러한 시각이 신선하게 비치는 것이다.
4. 탈성장은 살아가기 위해서 수단과 목적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다시 말해 탈성장 사고는, 경제성장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수단을 아무리 쌓아올려도 목적으로는 전환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절도를 넘어 수단을 추구하는 나머지(고도소비사회), 사회 전체가 그 도구적 이성 또는 효율에 따라 편성, 통합돼버리고, 비합리적, 비효율적으로 일(예를 들면, 딴짓, 잡담, 게으름, 멍한 것, 무의미한 소동 등)에 사람이 배제돼 버린다. 「생활고, 설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현상의 배후에 이러한 수단의 비대화와 목적의 왜소화 또는 부재가 있는 것은 아닌가?
탈성장 사고는 바로 근대가 낳은 경제 합리성, 효용중심 사고와 싸우는 것이지만 그 싸우는 방법을 또 하나의 합리성(예를 들면 앞에 기술한 ‘지속가능한 개발’), 또 하나의 효용에 의해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추구하는 자체를 철학이나 윤리학 분야에서부터 재고하려고 하는 싸움의 자세를 취하는 일이 많다. 대학 커리큘럼 구성으로 말하자면, 그 정치성 때문에 ‘사회과학의 여왕’ 등으로 불리우는 주류 경제학 수업보다도 철학, 윤리학, 미학을 가르치는 문학부 또는 인문계 수업에서 탈성장 사고를 생각해 보자고 하게 된다. 확실히 현재, 세계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주류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물욕을 긍정하는 전제가 세워져 있고, IT 혁명과 금융의 글로벌화에 의해 어느 틈엔가 삼라만상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실학 또는 비즈니스학이 되버렸다는 의미로, 반인간, 반자연이다.
그러나, 탈성장 사상을 더욱 깊게 논의하기 위해서는 근대 경제학 형성의 역사를 철학과 윤리학만으로 재검토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장의 자기조정 작용에 의한 인간사회 전체의 질서 형성(보이지 않는 손)에서 나타나는 수단의 목적화가 지금 재검토되지 않으면 안 되며,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 정치경제학에 있어서, 앞으로도 수단으로서의 「경제」를 어떻게 인간사회에 다시 접목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는 계속해서 남아있을 것이다.
맺음말 – 학연에서 벗어나자
탈성장은 시대사상으로, 지금을 떼어내 보는 하나의 사고방식이고, 본고에서는 자신이 이제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한 단면을 조금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근대’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그 지나친 과도함을 현대사회 분석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물으려고 한, 지금은 고인이 된 이반 일리치는 1970년대 에콜로지 운동을 지지하는 재야 사상가로서 학자들에게 주목되었지만, 머지않아 망각과 무시 속에 쫓겨났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그의 너무나 넓은, 학문영역을 초월한 사고의 전개를 좋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 그의 작품이 다시 읽히고 있다. 70년대보다 살아가는 것이 심각하리만큼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사고는 항상 기존의 학연을 넘어서, 학교를 한 번도 다닌 적이 없는 사람들 사는 모습까지도 비추는 탈학연 접근으로 일관했다.
탈성장 사고도, 마침 공동 편집하는 기회가 있던 ‘탈성장의 길’의 부제를 ‘나눔의 사회를 창조한다’(3)로 한 것처럼 다양한 생각, 사회적 실천을 개개의 전문영역을 넘어 나누고, 성장신앙 사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식과 행동의 방법을 함께 찾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주 1) 『노동의 메타모르포제 – 일하는 것의 의미를 찾아서』 안드레 골츠 저, 로크후(綠風)출판, 1997년, 284-285 페이지
(주 2) 나카노요시히로 번역 및 해설, 부제는 「증여, 행복, 자율의 새로운 사회」 작품사, 2013년 5월
(주 3) 『탈성장의 길』 마르크 앙베르와의 편저, 코몬즈 2011년
카츠마타 마코토 1946년생 메이지대학원대학 국제학부 교수. 개발경제학 박사. 전공은 국제정치경제론, 아프리카 지역연구, 메이지학원 대학 국제평화연구소 소장 주요저서 : 『아프리카는 정말로 가난한 것인가 – 서아프리카에서 생각한 것』, 아사히신문사, 1993년 『신 현대 아프리카 입문 – 사람들이 변하는 대륙』 이와나미서점, 2013년 『탈성장의 길』 마르크 앙베르과의 편저, 코몬즈,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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