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전환연구소 누리집에 게재된 글을 허락을 얻어 옮겨 싣습니다.
(링크: http://igt.or.kr/index.php?mid=abroad&document_srl=52495)
※ 이 글은 Great Transition Initiative(거대한 전환 계획) 사이트에 2015년 2월 게재된 칼럼을 번역하였습니다.
탈성장 대안
히오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
번역 : 조안나(편집위원)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탈성장(Degrowth)의 목적은 환경 보호주의를 다시 정치 이슈화하는 것입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녹색 성장”은 미래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적인 적대감을 탈정치화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을 통한 환경 문제 해결, 환경 파괴 없는 경제 성장 등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합니다. 생태화 학계와 탈성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대안적이지도 않고 녹색적인 발전을 실현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성장 기반의 발전을 현대화하려는 상상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칼럼에서는 이러한 녹색 성장 담론의 대안들을 살펴보고 성장 없는 번영과 공정한 세상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풀뿌리 실천과 정치적인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생태학 대 현대성
환경과 성장 사이의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개발론자”들에게 성장의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채광, 시추, 건축, 제조 등은 경제를 팽창시키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입니다. 개발론자들에 맞서고 있는 급진적인 환경주의자들과 지역 사회는 “성장만으로 이루어진 일방향 미래”(1) 의 불가피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이러한 반대 의견을 철학자 Bruno Latour(브뤼노 라투르)는 목적과 수단의 현대적인 분리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로 보았습니다(2).
지금의 주류는 생태계의 장래를 사실상 누락한 채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1992년 지구 정상 회의(Earth Summit)에서 나온 지속 가능성의 개념은 환경과 성장 사이의 충돌을 무력화하고 탈정치화했습니다. 이후 정부, 기업, “실용주의” 환경주의자들 사이의 협상에서는 새로운 시장과 기술이 경제 발전을 활성화하면서 자연계도 보호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환경 문제를 기술 향상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전문가, 정책 담당자에게 그 책임의 대부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10년 전 “탈성장”의 도발적인 공식화 – 이름하여 “미사일 구상(Missile Concept)이 추진되어 환경 보호주의의 탈정치화에 이의를 제기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의 모순”(3) 을 고발했습니다. 긍정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부정적인 단어 사용에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성장의 바람직성을 전복시켜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한 세계로 전환하기 위해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개념을 확인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탈성장의 목표였습니다. 탈성장 이론가들은 경제학적인 생각 바깥에서 성장할 수 있는 대안을 구성하도록 자본주의에 요구하는 “경제로부터의 이탈”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안적인 경제 모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한 “경제”라고 하는 영역이 자율적인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자유 시장”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며 고의적인 정치 개입을 통해 구성되었습니다. 경제를 다시 정치 이슈화하려면 민주통제(democratic control)를 되돌릴 수 있는 제도적 변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탈성장을 그리다
탈성장 지지자들은 오늘날의 성장 중심의 “자유” 시장을 대체할 청사진을 제공하는 것을 꺼리며, 공정한 방법으로 경제와 물질의 흐름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공유되는 대안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마련하고자 합니다(4). 물자 흐름의 규모를 줄이면 단순히 GDP 수치를 감소시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5). 하지만 탈성장은 경기 후퇴, 불경기와 같이 성장 경제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와는 맥락이 다릅니다. 탈성장에는 제한, 돌봄, 지출 등과 같은 용어가 시사하는 사회의 기존 시스템을 재고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6).
탈성장은 일반적으로 탄소 배출 제한, 은행에 대한 100% 지급 준비 제도 등과 같은 무형의 집단적인 제한(Limits)을 제안합니다. 이는 “자가 제한(selflimitations)” 즉, 모두가 추구할 수 있음에도 함께 이를 자제하는 집단적인 결정이며 제한된 크기의 사회 제도를 대중을 대신해 활동하는 기술 전문가가 아닌 대중이 직접 운영하는 개념입니다. 화석 연료와 핵발전은 오염을 유발할 뿐 아니라 관료와 기술 전문가가 운영하기 때문에 정교한 기술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 집약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하게 되기 마련이며 위험합니다. 많은 탈성장 지지자들이 고속철 또는 산업용 풍력 발전 단지와 같은 “녹색”의 거대 구조물조차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돌봄(Care)은 팽창 보다 재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사회의 특징입니다. 재생산은 일반적으로 가족 내 생명 주기를 유지하는 활동을 일컫습니다. 하지만 넓게 보면 생활유지와 회복의 모든 과정을 포함합니다. 오늘날의 경제 사회에서 돌봄은 한쪽 성에 치우치고 저평가되며 공식 경제(formal economy)의 그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탈성장은 돌봄이 동등하게 분배되고 사회의 중심에 놓이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에서 돌봄의 가치가 생기기 때문에 돌봄의 경제는 분명히 노동 집약적입니다. 그러므로 좀 더 인간적인 사회로 발전시키면서 오늘날 급증하는 실업률을 상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출(Dépense)은 사회적 잉여의 비생산적인 지출을 의미합니다. 자신들의 잉여를 할당하는 방식, 즉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필수품 이상에 대한 지출 행태가 그 문명의 특징이 됩니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잉여를 피라미드에, 티벳인들은 승려들의 무위 교육에, 중세 유럽인들은 교회에 쏟아 부었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문명에서는 잉여가 쌓이면 성장에 투자되기 때문에 지출은 개인의 과소비로 대체되었습니다. 과소비 자체만 제한한다면 다시 저축 및 투자 상승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탈성장은 근본적으로 잉여를 줄이고 그것을 시민들이 고안한 무해하고 새로운 방법, 즉 지역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회 환원을 제시합니다.
탈성장 강행
성장이 어떻게 환경과 사회의 안녕을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증거는 여럿 있습니다(7).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모든 사람, 특히 가장 취약한 계층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지구한계선(planetary boundaries)에 의해 정의된 안전 운영 공간(safe operating space)을 초과할 가능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녹색 성장”이 최근 몇 년 사이 유행어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효율성 향상을 강조함으로써 역설이 생겨납니다. 자원 요구량이 줄어들어 비용이 절감되면 수요와 공급의 작용에 따라 자원 소비가 다시 반등하게 됩니다(8).
부유한 국가들의 지속적인 경제 성장 또한 행복에 이롭지 않습니다. Herman Daly(허먼 데일리)가 주장했듯이 “병(illth)”(밀집, 범죄 등 원하지 않은 부작용)이 GDP의 부 관련 수치의 상승만큼 혹은 그보다 빨리 증가하고 있습니다(9). 성장이 아닌 재분배는 부유한 국가의 행복을 향상시킵니다. 상당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국민들과 서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1950년대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욕망도 함께 커지고 생활 수준에 대한 비교도 심해져 부로 인하여 평균 행복 지수가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성장이 지위를 과시하는 재화에 대한 욕망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재분배와 새로운 가치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성장의 혜택을 보지 못한 빈국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선진국의 탈성장으로 다른 국가들에게 생태학적 공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진국에 대한 강력한 탄소 배출 제한과 개발국에 유리한 교역조건을 통해 과거 탄소와 자원에 대한 빚을 지불할 수 있고 선진국과 개발국의 부를 재분배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의 탈성장은 남미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 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와 같이 개발국의 대안적인 세계관과 실천이 번성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안적인 형식의 개발이 아닌, 대안 그 자체입니다.
탈성장 전환의 씨앗
탈성장 대안은 공식 경제가 위기로 들어서면서 활발해졌습니다. 도시 텃밭, 코하우징(Co-Housing), 생태 코뮌(Ecocommunes), 대안적인 식품 네트워크, 생산자 – 소비자 협동조합, 공동 부엌(communal kitchens), 의료 서비스, 노인 의료, 공동 육아 협동조합, 공개 소프트웨어, 분산형 재생 가능 에너지 생산과 분배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대안 프로젝트에는 지역 화폐, 물물교환, 타임 뱅크(Time Bank), 금융 조합, 윤리적인 은행 등의 새로운 거래 형식이 동반되거나 지원되고 있습니다(10).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탈성장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며 생산과 소비 주기가 짧은 지역 기반의 경제로 탈바꿈하도록 합니다. 또한 이윤이 아닌 사용 가치를 만족시키기 위해 재생산과 돌봄을 강조하고 자발적 활동으로 임금 노동을 대체합니다. 축적하거나 팽창하려는 특성이 없으며 공식 경제보다 자원에 덜 의존합니다. 이러한 “공유(communing)” 행동이 연대 그리고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공유된 비화폐의 부를 창출합니다.
이렇게 대안적인 공급 형태를 제안함으로써 탈성장 전환은 아래에서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도할 대대적인 제도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기본 소득으로 국가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게 되면 모두가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자유롭게 비급여 활동에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일자리 보장의 보완대책을 통해 국가는 공공 복지를 지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고용할 수 있습니다. 임금 삭감 없이도 짧은 업무 시간과 일자리 공유로 실업을 방지할 수 있으며 여가와 공유를 위한 시간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채택하면 경제 성장 없이도 경제적 불안정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축적과 팽창이기 때문에 성장을 넘어서는 전환을 하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환이 필요합니다(11). 탈성장 전환은 과거의 시스템적인 경제적 전환과 유사한 패턴을 보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도 새로운 경제 활동과 독립체(회사, 무역 계약, 은행, 투자), 이러한 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정치와 제도의 발전(군주제와 봉건적 특권, 서민 계급의 형성, 자유 민주주의, 사유 재산의 법적 보호)사이의 연결을 점진시킴으로써 발전했습니다.
경제 성장이 한계에 다다름에 따라 현대의 풀뿌리 행동과 제도적 변화가 현재 시스템을 탈바꿈하는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탈성장 지지자들은 탈성장 전환의 필수 요소로 민주주의 심화(deepening democracy)를 꼽으며 점거 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형태의 민중 민주주의 실험을 환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Ashish Kothari(아쉬쉬 코트하리)가 지지하는 “급진적 생태 민주주의”(12) 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와 위임 민주주의의 요소를 결합한 체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탈성장 전환은 비폭력적이고 민주적이며 대상이 자본주의와 생산주의 모두이기 때문에 20세기의 혁명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성장에서 탈피하려면 자본주의에서 탈피해야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탈피하는 것이 성장에서 탈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는 대량 생산과 소비에 대한 자원 착취와 잉여 축적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 자본주의를 대체했습니다.
탈성장 운영
탈성장 이론이 이렇게 탄탄함에도 불구하고 지지자들은 여전히 규모와 운영에 대한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탈성장 지지자들은 안으로부터 국가를 바꿀 수 있는 세계적인 정치적 움직임을 야기해 탈성장이 부상할 것으로 보고 재지역화(relocalization)에 특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 자치에 대한 열망과 광범위한 행동의 필요성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혜택이 많고 적은 지역 간의 부담과 자원의 재분배에 중재와 지리학적인 의사 결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일정 수준의 계층제가 불가피합니다. 사실, 위에서 논의된 탈성장 개혁 중 일부는 상당히 간섭주의적이며 강력한 국가적 행동을 필요로 합니다.
게다가 범세계적인 운영은 탈성장 운동 내의 논의에서 대부분 빠져 있습니다. 기후 변화, 자유 무역, 치열한 세계 경쟁과 같은 문제의 중요도를 고려해 볼 때 이는 까다로운 부분입니다. 많은 탈성장 지지자들은 범국가적인 교역과 자본의 제한이 세계 경제의 폭력에서 한 나라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지역의 풀뿌리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의 변화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는 온실가스 배출 총량을 제한하자는 국제적인 합의 없이 지역들 차원의 저탄소 프로그램 제시만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전세계의 상호 의존적인 연결은 한 국가가 독립적으로 탈성장 전환을 추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럴 경우 자본 도피, 은행과 통화 붕괴, 자산 평가 절하, 공공 기관과 안보 붕괴, 정치적 고립 등에 의해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되며 국가가 스스로 차분하게 축소를 진행할 수 없도록 할 것입니다. 게다가 단일 국가 또는 국가 집단이 자신들의 경제를 성공적으로 축소시킨다면 전세계적으로 자원의 가격이 떨어져 다른 곳에서 소비의 반등이 야기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장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범국가적인 행동입니다. 탈성장으로의 전환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에필로그
탈성장을 위해서는 자연을 보호하거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감시키겠다는 약속뿐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 생태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행동 기준을 만들겠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견지에서 보면 거대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비용 편익을 계산하거나 성장을 수반하는 대안을 고안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프로젝트가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탈성장”이 그 대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각주
1) 탈성장 세계에 대한 생생한 내용이 담긴 Ursula Le Guin의 사회 과학 소설, The Dispossessed(London: Panther, 1975)에서 사용
2) Bruno Latour(브뤼노 라투르)의 “To Modernize or to Ecologize? That’s the Question(현대화냐, 생태화냐, 그것이 문제로다)”, Noel Castree and Bruce Willems-Braun eds, Remaking Reality: Nature at the Millennium(New York: Routledge, 1998) 221-242.
3) Serge Latouche, Farewell to Growth(Cambridge, UK: Polity, 2009). 미발표된 불어 문학 논평의 경우, Valérie Fournier,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ology and Social Policy 28, no. 11/12 (2008): 528-545,http://dx.doi.org/10.1108/01443330810915233 “Escaping from the Economy: The Politics of Degrowth(경제로부터의 이탈: 탈성장의 정치학)” 참조. “탈성장”(불어: décroissance )이라는 용어는 Nicholas Georgescu-Roegen, Jacques Grinevald, and Ivo Rens, Demain la Décroissance: Entropie-écologie-économie (Lausanne: Pierre-Marcel Favre, 1979)에서 영감을 받아 선택하였다. “가설”로서의 탈성장에 대해서는 Giorgos Kallis, Christian Kerschner, and Joan Martinez-Alier, “The Economics of Degrowth,” Ecological Economics 84 (2012): 172-180을 참조.
4) Francois Schneider et al., “Crisis or Opportunity? Economic Degrowth for Social Equity and Ecological Sustainability: Introduction to this Special Issue(위기인가 기회인가? 사회적 평등과 생태적 지속 가능성을 위한 경제 탈성장: 특별호 서론” Journal of Cleaner Production 18, no. 6 (2010): 511-518,http://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959652610000259 참조.
5 )Herman Daly, Beyond Growth: the Economics of Sustainable Development (Boston: Beacon Press, 1997).
6) Giacomo D’Alisa et al., eds., Degrowth: A Vocabulary for a New Era (London: Routledge, 2014). www.vocabulary.degrowth.org 참조.
7) D’Alisa et al., op. cit.; Daly, op. cit.; Tim Jackson, Prosperity without Growth (New York: Earthscan, 2008) 참조.
8) Blake Alcott, Ecological Economics 54, no. 1 (2005): 9-21, http://www.sciencedirect.com/science/
article/pii/S0921800905001084 “Jevons’ paradox(제본스의 역설)”
9) Herman Daly, op. cit.
10) Joana Conill et al., Otra vida es posible: prácticas alternativas durante la crisis (Barcelona: Ediciones UOC Press,
2012); Julie Katherine Gibson-Graham, The End of Capitalism (As We Knew It): A Feminist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6).
11) 불평등, 사회 정치적인 불안정, 일부 형태의 독재정치에 대한 위협 등이 심화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본의 아니게 부정적인 성장을 할 수 있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12) Ashish Kothari, “Radical Ecological Democracy: A Path Forward for India and Beyond(급진적 생태 민주주의: 인도와 전세계를 위한 경로),” The Great Transition Initiative (July 2014), http://greattransition.org/publication/radical-ecological-democracy-a-path-forward-for-india-andbeyond.
글쓴이
히오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는 생태 경제학자이자 정치 생태학자로, 바르셀로나 ICTA의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nergy and Resources Group of UC Berkeley의 Marie Curie Fellow였으며 University of the Aegean에서 환경 정책학 박사, Universitat Pompeu Fabra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런던의 Imperial College에서 환경 공학 석사, 화학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European Network of Political Ecology(정치 생태학 유럽 네트워크)의 조정자이며 신간, Degrowth: A Vocabulary for a New Era (2014)의 편집자입니다. 그의 연구는 사회와 자연 영역 사이의 개념적 구분을 포괄하는 탐색에서 시작되었으며 환경 파괴의 정치 경제적 원인과 권력, 수입, 계측에 따른 불공평한 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중 세계 경제와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지속 가능한 탈성장, 덜 가지고 더 잘 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미래로의 연착륙을 가설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Great Transition Initiative(거대한 전환 계획)
풍요로운 삶, 인류의 단결, 회복력 있는 생물권으로의 전환을 위해 전략과 비전을 나누는 온라인 포럼이자 국제 네트워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