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시대, 자립적 삶과 새로운 나라

* 무위당22주기 기념 생명평화활동가대회 발제문입니다.

탈성장 시대, 자립적 삶과 새로운 나라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1. 성장위기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사망 사건이 다시 주목받으면서 온 사회가 들끓고 있다. 2011년 산모들이 원인 모를 급성폐질환으로 사망하면서 문제가 된 이 사건은 현재까지 산모와 아이들을 포함해 총 239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의 당사자로 지목된 가해 기업들은 그동안 사과는커녕 법적인 다툼을 벌이면서 시간을 끌고 책임을 회피해왔다. 여기에는 대학교수와 대형 로펌, 무책임한 관료들도 공모자로 참여했다. ‘위생’과 ‘건강’을 내세우면서 생명을 죽이는 물질을 안방까지 침투시킨 ‘돈’의 무서운 위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 사건을 안방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라고 한다. 2년 전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304명이 목숨을 잃는 세월호 참사가 잃어났을 때, 생명과 안전을 소홀히 한 채 돈과 이윤을 좇아온 우리사회에 대한 통절한 반성들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전’과 ‘후’로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들도 쏟아져 나왔다. 생명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 참사를 잊지 말고 진실을 반드시 찾아내자고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참사의 진실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고, 사망 학생들의 흔적을 치우고,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려는 조직적인 움직임들을 분명히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가 바로 ‘경제 살리기’다. 이미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자꾸 되새겨서 사람들의 심리를 위축시키면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그 부담을 국민 전체가 지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와 의료기관의 초기대응 실패로 국민 16,752명이 격리되고 186명이 감염되어 결국 38명이 목숨을 잃은 작년의 메르스 사태 때도 정부와 정치권, 재계, 언론 일각에서 ‘경제 살리기’를 위해 속히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경제를 살린 후로 미루는 동안 돈의 위력 앞에 생명들이 위태위태하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보다 더 중요한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경제 살리기 골든타임’을 외치면서 밀어붙이는 노동개혁과 각종 규제완화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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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지금은 선성장(先成長), 후분배(後分配), 후보존(後保存), 후안전(後安全)의 논리 자체가 설득력을 잃고 있는 시대다. 성장 자체가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파이(pie) 키우기’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무한성장, 고도성장의 신화와 완전고용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기대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여기에다 ‘여적효과’(trickle down effect) 자체도 불평등과 양극화의 확대로 믿음을 상실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상대적 박탈감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인내나 기다림을 요구할 명분이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로 ‘더 빨리,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게’를 외쳐온 ‘성장 시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좌-우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근대 산업사회 전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다.

과학기술과 시장의 발달에 힘입은 성장을 바탕으로 한 진보와 발전의 개념도 바뀌어야 한다. 성장의 위기는 근대 국가와 민주주의 자체에도 균열을 내고 있다. 성장에 따른 이익은 소수가 독점하면서 그에 따른 비용과 손실은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돌려버리는 방식은 더 이상 지지받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그 책임의 칼날이 우파정권, 좌파정권 가릴 것 없이 기득권 집권세력으로 향하면서 정치적 격변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과 필리핀에서 극단적인 성향의 정치인에 환호하는 소위 ‘분노의 정치’ 현상도 이런 배경에서 등장하고 있다.

 

유한한 지구에서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무한한 성장을 믿고 거기에 의지해 온 근대문명은 지금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자유 경쟁을 통한 이윤 확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불균형과 양극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성장기반 자체가 도전받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제일 목적으로 해야 할 국가는 무능력과 무책임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기능적 분업에 기초한 직업적 전문가주의, 기술관료주의는 삶의 총체성을 파편화시키고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삶을 가로막고 있다. 이로 인한 삶의 위기는 심각하다. 노동, 복지, 주거, 환경, 교육, 의료, 먹거리, 육아 및 보육, 안전 등 삶과 직결된 기본적인 요소들이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위협받고 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경쟁과 속도에 지쳐가고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상태의 연장선에서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성장주의 시대가 만들어 낸 관성의 뿌리 또한 여전히 깊다. 경제성장제일주의, 결과중심주의, 속도주의, 개발주의, 물량주의, 공급주의, 소비주의에 중독되어 온 그동안의 관성은 생태계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고 경제적으로도 결코 타당치 않는 상식을 벗어난 일들을 지금도 버젓이 만들어내고 있다. 문제는 성장주의 시대의 낡은 관성은 성장위기 상황에서 더 큰 부작용과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한 예로, 사회 전체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 지자체도 인구감소를 전재로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하지 않는다. 2013년 기준으로 전국 지자체들의 ‘2020 도시기본계획’에 담긴 인구예측들을 모아보면, 2020년의 총 인구가 6,155만 명에 이른다. 지금보다 인구가 23%나 증가한 수치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허황된) 인구예측을 토대로 각종 수요 분석이 이루어지고,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과잉투자, 중복투자, 난개발, 막개발 같은 터무니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전력수요 과대 예측과 원전 확대 정책, 강에서 산으로 간 토건형 개발사업 등은 성장위기 시대에 더욱 치명적이다.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물음(?)은 점점 커지고 있는데 해결 방향은 여전히 모호하다. 과도기적 혼란, 전환기적 혼돈 상황이다. 우리가 익숙한 채 의존하고 있는 환경과 구조, 시스템 전반을 되짚어보고, 확신에 차있던 기존의 지식과 신념체계도 되물어봐야 한다. 이미 현실 자체가 그렇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과 다른 전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특히 미래세대 청년의 눈에 비친 현실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청년들은 ‘부모세대 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기대를 접은 최초의 세대라고 한다. 청년 5명 중 4명은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해도 삶이 더 나아질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한다. 청년들의 미래 설계에 부모 세대의 지식이나 경험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속적인 성장과 축적을 통해 과거 보다 더 나은 현재,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고 달려 온 직선적, 진화론적 발전논리는 설득력을 잃어 버렸다.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정말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탈성장 사회를 향한 새로운 발상과 용기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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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탈성장 시대, ‘자립’에 대해 다시 생각하자

 

성장 시대의 한계가 분명해지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탈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탈성장은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하게 생존하기 위한 길이다.

성장 패러다임의 틀로 보면 성장 동력이 떨어지는 저성장 상황은 커다란 도전이자 위기다. 해서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전의 성장을 회복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하지만 국내는 물론 세계 전체가 성장침체 상태로 크게 바뀌고 있는데 성장주의 시대의 사고 틀로 지금의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불행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는 다가올 성장 시대 ‘이후’의 사회를 제대로 준비하기 어렵다. ‘성장의 위기 또는 저성장 상황에 대한 대안 찾기’가 아니라 ‘탈성장의 새로운 사회를 향한 대안 찾기’가 필요한 때다. 탈성장 사회에 대한 분명한 전망을 가지고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탈성장 사회로 가는데 있어 많은 장벽과 해결 과제들이 놓여 있다. 지난 시절 국가주도의 고속성장체제를 이끌어 온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생태계 등 사회 전반의 자립 기반이 매우 취약해서 탈성장 사회로의 전환 비용(transition cost)이 매우 높은 편이다.

경제적으로 무역의존도가 90%가 넘는 대외 의존형 경제구조에서 수출환경과 환율변동 등 세계경제의 변화와 충격에 매우 취약한 것이 우리의 경제 현실이다. 게다가 대외 의존형 수출경제 이면을 들여다보면 농업∙농촌∙농민의 희생과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희생, 노동자 노동의 희생이 자리하고 있다. 각종 개발로 파괴되어 간 생태계의 희생도 마찬가지다.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경제규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식량과 에너지 자급률은 각각 23.8%(사료용 포함)과 3%에 불과할 만큼 생태학적 자립기반 또한 취약하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권력과 부를 집중시켜온 공간적 불균형은 수도권 외 지역의 자립과 자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중앙 집중형 정당정치도 여기에 중요하게 한 몫 했다.

결국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의존형 체제를 자립형 체제로 바꿔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바라거나, 외부의 자원과 힘을 빌려서 해결하려던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발전 모델을 ‘따라잡기’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지역과 생활의 자립 기반을 강화하는 내발적이고 순환적이며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자립’은 경제의 세계화와 생태위기의 지구화로 인한 충격을 흡수하고 완화시키기 위한 완충영역(buffer zone)을 만들고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높이기 위한 핵심적인 과제다. 나아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서 자립 기반을 다양한 영역에서 만들 필요가 있다. 마침 우리사회 곳곳에서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를 우리 힘으로 해결해 보자’는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율(自律),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생(自生), 자존(自尊), 자양(自養), 자작(自作) 등 ‘스스로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성장 시대의 종언이 빈곤과 결핍으로 이어지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립적 삶의 영역을 다양하게 찾고 만들어서 탈성장 사회를 향한 전망을 구체화시켜나가야 한다. 이와 관련한 주요 방향과 과제들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삶의 외주화’(life outsourcing) 시대에서 ‘자기 부양’(self-help, self-care) 시대로 방향을 바꿔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다른 곳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힘을 길러내야 한다. 이것은 의존적 삶에서 주체적 삶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물론 자립(自立)과 고립(孤立)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삶의 모든 문제를 개인 혼자서 다 해결할 수는 없다.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물론 관계 맺음과 역할에 있어 당사자의 자율성과 자기선택은 중요하다.

사람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좋은 관계를 통해 자립적 삶을 영위해 나갈 때 온전한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하버드대학의 한 연구에서 1939년부터 75년간 관찰한 결과 정신과 육체를 포함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필요한 요소로 ‘좋은 관계’(good relationship)를 지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개인의 고립과 불안, 경쟁을 통해 오히려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야 말로 지금의 신자유주의 속성이다. 자본의 자유, 경쟁의 자유로 삶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개별화 된 소비자가 가지는 선택의 자유는 함께 협동해서 만들고 나누고 베풀고 배우고 치유하고 돌보는 능력들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점에서 자립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호 연결된 존재로서 자기 주체성을 올바로 자각하게 하는데 중요하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누군가의 희생과 불행을 대가로 하는 삶의 방식은 더 이상 지속가능할 수 없다. 자기 몫의 필요노동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스스로 책임지는 데서 자립적 삶이 출발해야 한다.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 교육은 교사에게,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는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같은 논리로 먹거리와 식량 문제도 농민들의 역할로만 돌릴 수 없다. 그만큼 생산과 분리된 소비주의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데 있어서도 자립의 역할은 크다.

 

둘째, 지속가능한 관계를 통해 신뢰의 기반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고 편리해진 세상에서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는데 사람들은 외로움과 불안감을 더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촘촘하게 설계된 시스템 속에서 묻히고 잊혀지고 있다. 뿌리 뽑힌 채 떠돌아다니고,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만남들 속에서 지속적인 관계 맺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휘발성 사회, 매몰성 사회는 소위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가 보여주는 또 다른 얼굴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중심을 잡고 이웃을 살피고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긴 호흡으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실천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자립은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관계를 지속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셋째, 체질 변화를 위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경제적 측면에서 90년대 말 우리가 경험했던 IMF 외환위기가 급성질환이라면 지금 당면한 저성장 상황은 만성질환에 가깝다. 우리사회 전반의 문제들이 구조적인 특성과 맞물려 누적되어 온 것이 세계경제의 변화와 맞물려 나타난 것이 지금 당면한 문제다. 따라서 특별한 정책적 처방으로 단숨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성장위기가 가져올 새로운 환경에 대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사람이 아플 때 약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심할 경우 외과적 수술을 받기도 하는데, 잘못된 생활습관이 누적된 데 병의 원인이 있다면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습관을 바꾸고 체질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우리 현실의 문제로 돌아와 보면, 지난 시절 성장주의 시대가 만들어 낸 각종 요인들이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면 결국 해결 방법은 그 익숙함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데서 찾아야 한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소위 ‘다이어트’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물질적 측면과 제도적 측면은 물론 정신적(영적) 측면의 다이어트도 해당된다. 그리고 이 다이어트 전략의 최종 목적은 성장에 대한 깊은 중독과 의존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온전한 삶의 주체로서 자립적인 삶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데 있다.

 

넷째, 자립적 삶을 지탱시키기 위한 커뮤니티 전략이 필요하다. 성장위기로 인한 충격은 지역의 구체적인 생활 현장에서 삶의 위기로 나타난다. 자립적 삶을 지탱시키기 위한 커뮤니티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지역은 생산-소비-여가-생활이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터전이자, 개인과 사회를 이어주는 곳이다. 따라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자립적 삶의 기반들을 촘촘히 엮어서 전환의 거점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사람과 자본, 자원, 정보 등이 지역 내에서 순환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한 내부화 전략을 통해 지역 자립의 기반을 확충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거래비용 줄이기 차원을 넘어서 사회-공간적 신뢰 관계를 만들어 운명공동체로서 책임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는 지역의 생활영역에서 지역 자원(에너지, 광물, 물, 식량 등)을 지혜롭게 활용하면서 의식주와 의료, 교육 등 삶의 기본 필요들에 대한 지역의 자급력을 높이고, 지역민들의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공공재를 공동생산하고 공유가치를 창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섯째, 민주적인 방식으로 자립을 향한 전환의 전략을 펼쳐나가야 한다. 성장이 한계를 맞게 되면 생존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사회적 불신과 갈등도 커지게 되고, 이것을 빌미로 권위주의가 등장할 가능성 또한 높아지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 문제는 탈성장 전략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당사자들이 자기결정권을 실현하는데 있는 만큼, 자립을 실현하는 방식 또한 민주적이어야 한다. 관련해서 제도적인 정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독선과 독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근대적 경험주의가 한계를 보이고 있고 기존의 고정관념 자체가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자기 확신의 오류를 극복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매우 중요한 노력이다. 따라서 탈성장 사회에 대한 전망은 성찰적 개인들의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데서 찾을 필요가 있다. 예전 같으면 앞서 눈 뜬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따라가도 되지만, 지금과 같은 대중사회에서는 접근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비유로 들자면, 가급적 다양한 구성원들이 대화에 참여하도록 하고, 참여자들은 용기를 내서 각자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정확하고 솔직히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로 대화에 참여해서 공통의 지혜를 모아가는 노력이 어우러져야 한다. 탈성장 사회로 가는 민주주의 전략은 외부의 권위적 힘을 빌리지 않고 당사자들이 주체가 되어 서로 만나서 배우고 나누면서 삶의 자립기반을 만들어 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3. 자립적 삶을 위한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전망이 필요하다

 

성장의 위기가 곧 탈성장 사회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미래는 복수형이고 대안은 열려있는 만큼 기존의 가치나 체제로부터 ‘벗어나기’(脫)로는 한계가 있다. 벗어난 이후 열려진 상황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분명한 지향과 전망이 필요하다. 저성장, 제로성장, 마이너스 성장과 비교해 ‘탈성장’은 그 의미와 방향, 방식이 다르다. 탈성장은 ‘성장’ 자체로부터 시선을 돌려서 다른 가치기준으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모색한다. 따라서 전망과 전략이 없는 탈성장은 대안이 되기 어렵다. 탈성장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품은 ‘사회상’(社會相)에 대한 입체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성장 시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서 자립적 삶을 토대로 사회 총체적인 전망을 세워나가는 것을 ‘새로운 나라 만들기’로 부르고자한다.

사전적인 의미로 ‘나라’는 ‘국가’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나라’라는 말을 쓰려 한다. 그 이유로는, 첫째 지난 시절 국가주의와 성장주의를 강력하게 결합시켜 성장사회를 이끌어 온 ‘개발국가’(developmental state) 체제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 둘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 하는 기본적인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지금의 국가에게 성장위기 상황에 대한 해결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사회는 국가의 핵심 영역을 차지하는 기득권화 된 집단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삶의 주체들이 당사자로 나서서 스스로 지혜를 모으고 역량을 키우고 대안을 만들어감으로써 실현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성장주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 탈성장은 다양성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운 사회를 지향한다. 따라서 대안의 성격도 자본주의 주류 사회에 대한 ‘대안적 경제’, ‘대안적 사회’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경제적 대안’, ‘사회적 대안’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을 향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성장을 통한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핵심 과제 또한 대안의 영역들을 입체적으로 꿰어내는데 있다. 인간 삶의 영역을 기계적으로 분할할 수 없듯이 대안에 대한 모색 또한 총체적이고 유기적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관련해서 몇 가지 영역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새로운 나라로서 탈성장 사회에서는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준의 삶을 보장하되, 사적인 이윤추구 보다 공익적 가치실현에 기여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사회적으로 더 인정하고 더 많이 지원함으로써,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동기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산업사회의 노동통제 시대에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공지능의 적용으로 노동 자체가 배제되는 시대로 넘어감에 따라 자립적 삶에 있어 노동에 대한 접근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즉 성장위기 상황에서 테크놀로지 실업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만큼, 공식경제 영역에서 정규직 일자리 만들기의 차원을 넘어서서 일과 삶이 결합된 다양한 대안의 노동영역들을 적극 찾고 만들어 내야 한다. 관련해서 임금과 화폐를 중심으로 한 산업사회 노동에서 비공식부문의 그림자노동으로 취급되었던 부문도 살림노동의 영역으로 새롭게 살려낼 필요가 있다. 또한 기술 발달에 따른 노동시간 축소가 고용 감소로 가지 않고 여유 시간을 창조적 활동과 정신적(영적) 충만함을 통해 삶에 대한 가치와 생활양식을 새롭게 바꿔내는 방향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또한 탈성장을 통한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서 농업의 역할도 재평가 되어야 한다. 농업의 식량생산 역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이 외에도 농업이 가지는 사회, 경제, 생태적 역할은 성장위기 시대에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농업이 가지는 고용 창출 효과 또한 성장위기의 충격을 흡수하는데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다양한 영역과 과제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실현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와 경제 시스템 자체가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정치, 경제 시스템에다 새로운 대안의 영역들을 결합시켜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보다 정교한 설계와 추진 전략을 필요로 한다.

첫째, 새로운 나라 만들기를 위한 경제적 대안의 간략한 밑그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사회적 기초가 되고 규모의 경제가 필요한 에너지, 교통, 물 등 기간산업 분야는 시장에 맡기기보다 ‘공공부문’에서 맡아서 수익성보다 공익성을 우선해서 공정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다. 한편, 의식주, 교육, 의료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의 생산 및 공급, 관리와 관련해서는 관련 당사자들이 경영과 노동, 이용에 민주적으로 참여하여 책임 있게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이 부분은 ‘협동조합 경제’ 영역이 담당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지역화폐를 통한 지역순환 경제 영역의 확대도 필요한 일이다. 나머지 ‘일반 시장경제’ 영역에 대해서는 사회책임투자(SRI, Socially Responsible Investing),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 회계 감사, 지역공동체 투자(community investing) 등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을 높이고, 소규모 자영업과 가족단위 개인사업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또한, ‘비공식 경제’ 영역에 속해 있는 무보수 자원 활동, 육아와 가사노동 같은 돌봄과 나눔 활동 영역, 수작업과 메이커(maker) 영역 등은 지역 차원에서 대안의 경제 영역으로 활성화시킴으로써 삶의 자립 기반을 지원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서 정치적 대안도 매우 중요하다. 정치는 한 사회의 권력과 자원, 정보의 흐름과 배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득권 정당들이 보여주는 현실의 선거 정치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4-5년 주기로 치러지는 선거를 통해서는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사회 전반의 총체적 전환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이점에서 기성 제도 정치의 한계를 보완하고 새로운 변화를 촉발하는 차원에서 대안정치 영역으로서 시민의회 즉 ‘민회(民會)’를 구상해 볼 수 있다. 민회는 선거정치에 직접 개입하기보다 사회 전체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 시민사회와 소통을 통해 핵심 의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요즘 이야기되는 중간지원조직과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우선, 지역 차원에서는 지방의회와 별개로 경륜과 신망을 갖춘 사람들로 시민의회를 구성해 지역주민과 지방의회, 지자체 상호간의 소통을 매개하고, 개발욕구의 즉자적인 해결을 넘어서 지역의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하고 성숙된 여론을 모아내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민회가 신뢰를 바탕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지역주민들의 직접 선거로 뽑는 방법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차원으로,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책임있게 고민하고 준비하는 (가칭)‘미래위원회’ 같은 단위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출 및 임기 구조와는 별개로 헌법에 의해 보장된 정치적으로 독립된 기구로서 미래위원회의 위상을 두고, 국민투표를 통해 도덕성과 전문성을 갖춘 사회 지도자들을 위원으로 선출해 임기를 보장하고, 예산도 별도로 편성하고 조사∙연구 기능도 부여함으로써, 정치적 당파성과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한다. 미래위원회의 핵심 역할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주요 방향과 전략 및 핵심 과제들을 조사하고 발굴해서 교육과 홍보, 의견수렴 등 다양한 소통과정을 거쳐 바람직한 미래사회로 가기 위한 기본 방향과 핵심 내용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이처럼 지역과 국가 차원에서 시민정치의 공간이 건강하게 자리 잡게 되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갈등과 분열로 피로감을 증폭시키는 제도정치의 지형도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생명운동의 자기 성찰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생명운동의 범주에는 생명공동체, 생명협동, 생명평화, 생명문화 등 다양한 영역들이 포함된다. 생명운동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 개체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생명 본성에 맞게 생존해 나갈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서부터, 유기적 상호의존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서로 살림의 관계를 만들고 실현해가는 노력, 나아가 전일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가치운동, 영성운동까지 그 차원이 다양하다.

생명운동이 지향하는 가치와 내용에는 오랜 인류의 경험과 지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운동 양식으로서 ‘생명운동’이란 이름을 가진지는 약 30년 정도 된다. 그동안 생명운동은 주류의 사회운동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흐름들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은 생명운동만의 고유한 의제가 아니다. 이 글의 시작점에서 짚었듯이 최근 들어 수많은 생명들을 순식간에 죽음의 위기로 내모는 각종 사건, 사고들이 빈발하면서, ‘생명’은 사회의 중심 의제로 등장했다. 생명의 안전과 건강에 대한 사회의 절박한 요구와 함께 ‘생명’이란 말은 각종 정책과 제도, 사업, 교육, 사회실천 활동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물론 생명에 대한 이런 높은 관심은 생명운동 차원에서도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변화들이 생명운동 영역에 던지는 질문도 만만치 않다. 더구나 성장위기 시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탈성장 전략을 펼쳐나가는데 있어서도 생명운동 스스로의 역할을 되짚어 볼 때다.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이르기까지 자본과 권력의 폭력성과 무책임성을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불안과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참혹한 현실에서 생명운동은 그동안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개발과 파괴에는 신을 능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능력은 갈수록 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생명운동이 그동안 애써온 현장의 활동들은 현실의 변화에 얼마만큼 영향을 주고 있는가?

혹시나 각자 자신의 영역 활동에 집중하면서 사회 전체적인 변화, 나아가 체제적인 전환에 대한 고민과 준비를 소홀히 해오지는 않았나? 주류 사회운동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비주류의 영역에 안주시켜오지는 않았나? 전일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생명운동이 각자의 활동에 매물 되어 상호 교류를 통해 총체적인 전망을 함께 세우기보다 파편적으로 대응해 오지는 않았나?

생명운동이 표방해 온 가치를 현실의 구체적인 실천 양식과 모델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가치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오히려 지금은 가치 자체가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지는 않는가?

 

스스로의 활동을 돌아보기 위한 성찰적 질문은 우리사회 협동조합 운동 영역에게도 던질 수 있다. 특히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한 삶의 자립 기반을 만드는데 있어 협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자본주의 초기와 성장기에 나온 협동조합 이론과 모델을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찾을 필요가 있다.

살펴보면 지금까지 협동조합이 성장해 온 데는 성장경제 시대가 만들어 놓은 물질적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성장경제와 함께 중산층이 늘어나고 소비주의의 확산과 함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대적 환경은 우리나라 생협을 포함한 협동조합들의 성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앞으로 당면하게 될 성장위기 시대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환경으로 협동조합들은 많은 도전을 맞게 될 것이다. 생산자나 노동자 조합원의 소득증대와 소비자 조합원의 구매력 향상으로 협동조합의 성장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런데 성장위기의 상황은 다른 한편으로 협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더욱 높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별화 된 삶의 불안감은 ‘협동적 생존’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오늘날 협동조합은 조합원 욕구(desire)의 충족을 넘어, 필요(needs)를 해결하고, 열망(aspirations)을 실현하는 다중적인 역할을 요청받고 있다. 특히 탈성장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조합원 욕구의 즉자적 해결을 넘어서 조합원을 포함해 사회 전체의 공동체적 관계를 증진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들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 총체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먹거리, 돌봄, 안전 등 삶의 필요와 관련된 공공재를 공동생산 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따라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많은 협동조합들이 일자리 만들기와 사회서비스 제공 측면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앞으로 성장위기 이후 사회에서 삶의 자립을 위한 토대들을 튼튼하게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활동 영역들을 더욱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시장의 치열한 경쟁 체제에 진입해서 살아남기 위한 사업적 방식으로, 또는 공공의 책임과 역할을 민간영역으로 떠넘기기 위한 수단으로서 협동조합이 활용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삶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협동조합의 역할을 주식회사와 대비해 설명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탈성장 전략을 통한 새로운 나라 만들기와 같은 총체적인 ‘사회적’ 전망이 협동조합 영역에도 필요하다. 자립에 기반한 사회적 전환에 있어 협동조합의 역할은 중요하다.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 등 ‘사회적’ 개념을 가진 영역들이 다양하게 출현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수식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 함께 만들어 갈 사회에 대한 전망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프로그램과 사업들이 이루어질 경우 소위 말하는 ‘소셜 워싱’(social washing)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