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크라트

중앙집권적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 체제 

 

1986년 4월 26일 구소련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가 녹아내리는 초대형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직원과 소방수 300여명이 사망하고 주변 지역은 고도의 방사능에 오염되어 인근 30km 이내의 주민들은 모두 강제로 이주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 정부에 의해 방사능 누출 정도와 사고 후 질병 발생률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지만, 많게는 47만여 명에서 적게는 1만 4천 명이 암에 걸려 사망할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특히 방사능 피해는 오랜 세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실제 피해자 수는 사고 후 30여 년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예측합니다. 이 사고의 피해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야채, 우유 등 식품의 방사능 오염으로 이어졌습니다.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핵 폐기장 유치 문제가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핵무기와 달리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는 핵 발전의 안전성에 대한 우려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성’의 문제만큼이나 더 심각한 문제는 핵발전소와 같은 고도의 기술 체계에는 필연적으로 정보의 독점과 권력의 집중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안전하다고 주장은 하지만, 잠깐 방심이라도 하게 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관리를 맡게 되는 것이지요. 전문가들은 정보를 독점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잘 생각해 보면, 핵발전소처럼 하나의 공간, 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전체가 철저하게 전문가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사회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 노동을 관리하면서 합리성, 능률, 성장을 내세워 더욱더 권력을 집중하고 강화해 나갑니다. 전문가 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중앙 집중, 중앙 집권으로 이어집니다. 이 전문가들이 기술 관료, 즉 테크노크라트를 형성하게 됩니다. 최근 중국사회가 급속한 경제성장을 하면서 후진타오와 같은 기술 관료들이 지배계급의 얼굴로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테크노크라트 지배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를 둘러싼 모순과 부조리를 전체로서 보는 시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생태주의 운동가인 웬델 베리의 지적처럼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대실패를 일천 개에 이르는 수많은 문제들로 세분화해, 이들 문제를 다시 학계와 관계(官界)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천 명의 실무진들에게 맡겨 해결할 수 있다는 … 구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전문 분야에만 빠져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죠. 중앙 집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의 특성,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인간의 삶을 평균화시켜 섬세한 삶의 문제를 간과해 버립니다. 

 

수돗물에 불소를 넣어 충치를 예방하자는 주장은 이런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치과의사들은 충치의 문제를 전문 영역으로 한정시켜 문제의 해결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충치는 설탕의 과다섭취와 같은 생활습관을 고침으로써 치료할 수 있는 생활의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치과의사들의 주장처럼 불소의 독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불소와 같은 화학물질에 취약한 노약자, 유아 등의 개인적인 편차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내세워 이런 편차를 무시하고 인간의 삶을 평균화시키고, 모두가 마시는 수돗물에 일괄적으로 불소를 집어넣는 것을 주장합니다. 

 

현대 사회로 오면서 우리들은 생활(의식주, 상하수도, 전기와 에너지, 폐기물의 처리, 보건의료, 교육과 문화생활 등)의 대부분을 전문가 혹은 테크노크라트들이 지배하는 전문기관(시장과 행정기관)에 위탁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윤만을 추구하는 시장과, 사람들의 삶을 평균화시키면서 획일적인 기준만을 적용하는 행정기관은 섬세한 삶(생활)의 문제, 일상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결국 테크노크라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일상의 생활과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통합하는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삶의 현장으로서의 지역을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테크노크라트들에 삶을 위탁한 정도만큼 우리들의 삶은 주변화합니다. 생명운동에서 ‘자치’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처한 주변성에 대한 자각을 통해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전문가가 아닌 생활인을 중시하고, 중앙이 아닌 지역을 운동의 실현이 장으로 삼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마츠 프리버그 외, 세계의 녹색화, <한살림>, 한살림 편, 1991 

– 조혜정, 새로운 사회운동의 모색: 운동가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크리스챤아카데미 주최 <90년대 한국사회와 민간운동의 방향Ⅱ> 발제문, 1992.3.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