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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의가 느슨한 수준의 합의 프레임 속에서 치러졌다.
・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UNFCCC COP21)가 2015년 11월말부터 2주간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기후변화 총회는 회의 개최지 파리에서 회의를 불과 몇 주 앞두고 최악의 테러가 발생해 비상사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지만 역대 최대 규모인 세계 150여 국가 정상이 참가하는 등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회의였다.
・ 불투명한 상황에서 치러진 이번 기후변화 총회는 사전에 합의의 프레임이 거의 짜여 있어 타결 전망도 높았음. 교토의정서 체제를 대체하려는 시도가 2009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COP15에서 한번 좌초한 적이 있어, 이번 파리 회의에서 새로운 기후체제 수립이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부분의 국가가 동의하고 있었다.
・ 파리 기후변화 총회의 합의를 낙관적으로 전망한 데는, 선진국들이 새 기후체제 출범의 실패가 반복될 것에 따를 비난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던데다, 이번부터 국가별 자발적 감축 목표(INDCs)라는 제도를 채택함으로써 실제 각국의 온실 기체 감축 의무가 느슨해졌던 점도 작용하였다. 가장 큰 두 온실가스 배출국이자 코펜하겐 회의 이후 당사국총회를 사실상 좌우해 온 미국과 중국 정부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뀐 데도 이런 변화가 영향을 주었다.
・ 선진국들에게만 강제적 감축 목표를 할당한 교토의정서 체제와 달리, 이번에 바뀐 방식으로 인해 90%에 가까운 국가들이 자발적 감축 목표(INDCs)에 동참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각국이 제출한 감축 목표를 모두 합하면 금세기 말까지 평균 기온이 2.7도에서 3도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어, 기후변화에 취약한 국가와 집단에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전향적인 문구가 담겨 있는 파리 합의문, 그러나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이행방법은 여전히 모호한 상태다.
・ 예정 시간을 하루 넘겨 12월 12일 발표된 파리 합의(Paris Agreement)는 교토의정서 체제(2008-2012년) 이후의 공백 상태를 해결할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 파리 합의문의 전문(preamble)에는 식량 안보, 정의로운 전환, 괜찮은 일자리, 인권, 취약한 상황에 놓인 원주민·공동체·이주민·아동의 권리, 발전권, 젠더 평등, 세대 간 형평성, 어머니 지구, 기후정의 등 과거에 찾아볼 수 없던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앞으로 파리 합의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보다 각국의 기후 정책과 국제적 지원을 전향적으로 요구할 근거가 될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추상적인 표현들이 실제 합의 본문에서 구체적인 이행 방식과 구속성이 결여된 문제를 피하기 위한 미사여구라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합의된 본문에서는 초안에 존재했던 감축 연도와 감축량 목표가 사라졌고, ‘탈탄소(decarbonization)’가 금세기 말까지 ‘순배출량 제로(net zero)’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상쇄기술이나 탄소시장의 역할을 함축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화석 연료 종말 선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 다만, 산업화 이전에 비해 평균 온도 상승을 2도보다 훨씬 낮게(well below 2˚C) 유지하고 1.5도로 억제하도록 노력한다는 온도 목표 설정은 기후 취약국들의 요구를 반영한 성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발적 감축목표 방식 하에서 이것이 선언적 의미를 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즉 구체적인 실현가능성과 방법은 2023년부터 5년마다 공동으로 이행 실적을 검증하고 각국의 목표를 재설정한다는 약속 이상이 제시되지 않아, 영국의 조지 몬비오는 <가디언>의 칼럼을 통해 이번 합의가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기적이지만, 해야 할 것에 비해서는 재앙이라고 평했다.
・ 합의문은 긴 협상 과정에서 초안에 포함된 정도의 구속력도 잃게 되는데, 예를 들어 손실과 피해(8조)에 대해 선진국들이 법적 책임과 보상 개념을 거부하면서 추후 논의하는 것으로 했고, 재정(9조) 역시 조달 방법에 대한 명시적 언급 없이 선진국이 부담하고 개발도상국은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다만 2025년까지 연간 1천억 달러를 조성하는 지금의 목표를 유지하고 이후 그 이상의 목표를 다시 설정하기로 하였다.
・ 결국 파리 합의는 55개국 이상의 비준과 함께 비준 국가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 세계 배출량의 55% 이상이 되면 발효되는 국제법적 성격을 갖지만, 합의를 위배할 경우 국제적 평판 하락이나 도덕적 지탄 외에는 공식적 처벌이나 제재가 없는 상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는 ‘파리 이후’의 해석과 후속 논의가 많은 어려움을 노정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파리 합의를 둘러싼 자본의 도전 속에서 대안을 찾는 움직임들이 나타나고 있다.
・ ‘탄소배출 제로’를 위한 각국 정부의 정책과 기술적 수단 및 기후 재정 마련에 있어 기업들의 참여가 많아지고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이번 파리 총회 후원사에 에어프랑스, 핵발전과 석탄화력 발전 사업을 하는 EDF(프랑스 전력공사), 화석연료 금융사업을 하는 BNP 파리바스 등이 참여했고, 그 결과 기후협상이 투자기회를 잡는 무역박람회와 같아졌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 이번 파리 합의가 각론과 방법론이 결여된 만큼 향후 책임과 보상을 위한 기후 재정 문제가 주요하게 부각될 전망인데, 문제는 앞으로 조성될 기후기금이 화석연료 사용의 실질적인 감소와 기후정의 실현보다 기업들의 새로운 사업기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한국 언론 다수가 파리 합의 타결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감축 부담이 한국경제에 미칠 부담을 우려하고 탄소시장에 대한 한국 기업의 진출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고 있다. 사실 한국 정부가 제출한 BAU(현 추세 지속) 대비 37% 감축 목표는 경제단체들의 엄살과 달리 실제로 큰 부담이 되지 않고, 따라서 한국 기업들의 사업 전략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음. 그만큼 기후변화 방지를 위해 탄소배출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감축시킬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고민과 노력은 부족한 실정이며, 오히려 파리 합의가 정부의 핵발전 확대 드라이브의 빌미가 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 파리 합의는 유엔 기후체제를 살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중요한 결정들에는 5년의 유예를 둠으로써 이후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런 가운데 유엔 체제와 국가나 기업의 대응 움직임과는 별개로, 민간 영역 차원에서 에너지 전환을 위한 자발적인 움직임과 에너지 자립과 연대의 노력들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세계 여러 곳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에너지와 먹거리 관련 생산과 소비 협동조합, 에너지 전환마을 운동 등 지역에 기반하면서 지역을 가로지르는 결사체들의 대안적 활동 사례들을 통해 파리 협약 이후 기후정의 체제의 청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