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자치 공동체운동과 새로운 세상
– 이 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연구위원)
1. 서로가 서로를 착취 않는 세상
후기산업사회는 여러 가지 특징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등장 및 그 광풍이 세상을 압도하는 현상과 동시에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러한 세상의 특징은 모든 것을 분리시키고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을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으로 분리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들이 주로 전담하곤 하는 돌봄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상도 더욱 심화시킨다.
어디 여성들의 돌봄노동뿐이겠는가? 이 세상에 자기 자리에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던가? 하지만,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조차 노동하는 사람을 임노동자로 국한시킨다. 이러한 임노동 중심의 사회구조분석은 임노동자가 아닌 노동을 하는 사람(주부, 학생 등)들을 임노동자에 기생해 살아가는 존재로 역시 분리시킬 뿐이다.
이러한 분리는 단순한 분리가 아니라 차별적 분리를 가져온다. 한정된 파이 중 자신들이 보다 많은 파이를 갖기 위해 서로 싸우게 만든다는 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고… 내가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네 것을 줄이고 내 것을 늘려야 한다는 경쟁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좌우한다. 이는 이제 대부분 사람들 DNA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 커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경쟁’으로 채워졌고,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강요한다. 많은 이들이 현대 사회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개별화에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금은 각자도생이 아닌 경쟁이라는 수레바퀴를 매개로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참 아이러니하다. 경쟁에서의 승리로 뭔가를 얻기 위해 평생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니… 언제쯤에야 우리는 이 경쟁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아마도 죽기 직전에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우리는 평생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평생을 손에 잡을 수 없는 뭔가를 위해 희생해야 할 텐데 말이다.
물론, 우리들 중의 극히 일부만이 최종 경쟁에서 승리해 성공을 보장받곤 한다. 최근에 이들은 우리 사회 구성원의 1%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들은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1%에 들기 위해 우리의 모든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 그 투자가 희생인 이유는 우리 중 99%가 그럼에도 최종 승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1% 만이 그러한 투자로 인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니 나머지 99%에게는 그러한 경쟁에 자신을 온전히 집어넣는 삶이 희생으로 점철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기보다 분리시킴으로써 지탱하는 우리 세상은 여성과 남성을, 성인과 미성년자를, 잘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 인간과 생태 환경, 도시와 농촌 등을 상호 적대적 관계로 분리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적대적 분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숨결을 교환하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서로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관계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그리고 나 또는 우리 편의 풍요를 위해 너 또는 상대방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며 살아가는 것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을 착취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 스스로도 그 착취의 고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착취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아닐까? 비록 우리는 그럴 맘이 추호도 없을지라도…
우리의 ‘원죄’는 우리가 그러한 착취의 순환고리 속에 놓여있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러한 착취와 피착취의 순환고리를 벗어나, 그 원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립’의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최소한 자립은 타자에 대한 착취를 전재로 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장 조그만 것이라도 자립을 위한 실천을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2. 자립과 공동체는 폐쇄적인가?
우리가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를 벗어나기 위한 자립의 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각자도생으로 환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자립’은 남과의 관계를 끊고 홀로 살아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는 그러한 착취-피착취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다. 각자도생의 원리야말로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러한 관계를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없이 각자 살아간다는 것은 남의 고통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자립’도 ‘나’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자립은 공동체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마을’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욕구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 공동체라는 용어 또한 많은 오해를 낳는다. 그것은 공동체를 그 구성원 간의 긴밀한 관계로만 파악하려는 경향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를 폐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실상 자립과 공동체는 패쇄성을 통해 실현 가능한 듯 보인다. 하지만, 공동체는 단순히 그 구성원들의 폐쇄적인 관계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보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해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근린지역 주민들 간의 안면성과 긴밀한 관계 및 공통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일차적으로 중요시 한다. 이는 미국의 힐러리라는 학자가 공동체라는 개념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세 가지 요소를 지역성(locality), 사회적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 공통의 유대(common tie)라 설명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런데 100년 이상의 공동체 실험을 성찰해 온 현대공동체주의자들은 우리의 통념과는 다른 성찰의 내용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특정한 공동체가 속한 사회가 공동체적이지 않다면, 결국 그 사회에서 공동체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농촌지역에 생태공동체를 만들고 자립의 삶을 살려고 해도, 우리 사회가 그러한 노력을 수용할 수 없다면 이 또한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도시농업을 통해 일부분이라도 자립의 삶을 실천하려 해도, 우리 사회가 그리고 세상이 기본적으로 농촌에 대한 도시의 착취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저 자족적인 것에 그칠 것이다.
물론, 공동체가 다른 사회적 대안 이론에 비해 강력할 수 있는 힘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대안적 모습을 가시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구체적 근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실천과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하지만, 그 자체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스럽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공동체도 그러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해 수도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수도공동체 자체가 하느님 나라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씨앗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도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또 다른 구분을 만든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립은 남과는 무관하게 내가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충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립의 근거로 건설하고자 하는 공동체도 그 구성원들만이 만족하는 그러한 폐쇄성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가 과거의 촌락 공동체를 오늘날 다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립과(의) 공동체는 ‘나’를 넘어 ‘우리’로, 그리고 소수의 ‘우리’를 넘어 세상과 긴밀히 소통하고 변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개방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는 자립의 가치,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사회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회를 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려는 ‘사회운동’으로 ‘자립’과 ‘공동체’를 설정하는 것이야 말로 ‘자립’과 ‘공동체’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대공동체주의자들이 성찰한 내용이기도 하다.
3. 나와 우리를 더 넓은 세상과 연결시키는 풀뿌리운동 과제
풀뿌리운동은 풀뿌리 즉 소위 ‘민초’들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이다. 이 풀뿌리운동은 지역사회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들을 그 운동의 주체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자니 풀뿌리운동은 보다 많은 주민들의 참여를 일차적 과제로 삼는다. 자립이든 공동체든 간에 그것이 아무리 정당하고 우리 사회의 대안이자 희망이라 해도 사람들이 이에 동참하지 않으면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참여, 이를 통해 대안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 강화, 그 대안을 사회적으로 확산・강화시킬 수 있는 영향력 강화를 중요한 지향으로 삼는다.
풀뿌리운동이 일차적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풀뿌리운동의 의제가 주로 일상생활과 밀접한 것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당위나 명분으로 참여를 결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상의 자기 이해를 가지고 참여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다보니 풀뿌리운동은 각 사람들의 개별적 이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개별 사람들의 이해에 민감하다는 것이 이들의 분절된 이해 하나하나를 모두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풀뿌리운동은 각 개인들의 분절된 이해를 ‘우리’의 이해로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 그래야 그 속에서 역량의 강화든 영향력의 강화든 하는 것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뿌리운동에 있어 공동체는 중요한 실천적 개념이다.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나’의 이해를 ‘우리’의 이해로 변화시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풀뿌리운동은 공동체인 마을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풀뿌리운동에 있어 공동체가 특히 중요한 것은 참여 집단들이 공동의 이해를 실현하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풀뿌리운동은 참여 집단들의 내부 운영에 있어서도 풀뿌리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풀뿌리적 운영방식이라 함은 그 구성원들 간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 상호 긴밀한 소통 등을 의미한다. 즉, 특정 지도자에 의한 수직적 관계가 아닌 구성원들 각자가 주체적인 참여와 역할을 수행하고, 그 모임의 주인으로서 위상과 역할을 하도록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을 대변하는 활동은 풀뿌리운동의 주요 전략에 전면적으로 위배된다.
또한 풀뿌리운동은 무엇에 반대하거나 요구하는 등을 넘어 대안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살고 싶은 대안적 사회의 모습을 공동체를 통해 가시적으로 구현하고 제시하고자 한다. 물론, 공동체는 당장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완결된 어떤 모습을 지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지향을 갖고 그 과정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공동체주의자들의 성찰 또 한 가지,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 수단과 방법도 공동체적이어야 한다는 내용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풀뿌리운동은 그러한 공동체적 운영원리를 참여 집단들 속에서 서서히 구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풀뿌리운동의 이러한 실천 방법과 그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들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것은 이해가 맞는 사람들이 모여 그 이해를 실현하는 조그만 활동들이 어떻게 전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는 한편 수긍되는 면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비판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수긍되는 면은 풀뿌리운동이 특정 이해에 대한 공감대를 통해 전개된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회 또는 세상의 대안으로까지 참여자들의 이해를 확장시키는 일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온 우주의 모든 요소가 한 사람 안에 담겨있듯이, 세상의 모든 문제도 지역에서 구체적인 생활의 문제로 발현된다. 따라서 현재 풀뿌리운동이 전격적으로 대안을 이야기하고 이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지나치게 더디다 해서, 그러한 가능성이 없다 비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문제는 풀뿌리‘운동’의 과제라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주민들이 집단적인 참여를 통해 개인의 이해를 우리의 이해로 공감대를 만드는 과정은 일차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이다. 참여자들의 이해에 대한 공감대가 결국은 우리 세상의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자립과(의) 개방적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도 당위와 명분 주창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보다는 이들의 이해가, 이들의 공감대가 그 외연을 확대하는 과정을 통해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보다 가능하다. 즉, 내가 이웃한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웃한 이들의 욕구에 대해서도 조금씩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 풀뿌리운동의 과제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운동이 진정으로 세상을 대안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는 바로 네트워크다. 지역사회로부터 시작하는 네트워크가 이 세상의 문제를 조금씩 하나씩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 폐쇄성을 박차고 나아가 세상과 교류할 필요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공동체들 간의 네트워크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 즉 운동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네트워킹은 특정한 공동체가 가진 이해를 다양한 사회적 가치와 만나게 해주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 이는 공동체가 다양한 사회의 대안적 가치들을 자신들의 가치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또한 이는 조그만 지역에서 공동체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세상을 대안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힘으로 전이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래전 어떤 일본 생협 역사에 관한 책을 본 적이 있다. 생협에 참여하는 주부들은 자기 가족의 안전하고 건강한 식탁에 대한 욕구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반 모임에서 함께 수다를 떨면서 그 수다의 주제가 점점 확대됐다. 어떤 조합원 자녀의 왕따 문제로부터 시작해 대기업의 마트가 생협 인근에 입점한 문제 등으로… 이는 조합원들의 이해가 점차 지역사회의 다양한 의제들로 확대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결국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애초 자기 가족의 먹거리에 대한 관심으로 생협에 참여한 주부들이 일본에 입항한 핵 항공모함 앞에서 반핵 시위를 벌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끝난다. 풀뿌리운동이 지향하는 과정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공동체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공동체가 지나치게 그 이상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대중들이 쉽게 참여하기 힘든, ‘좋기는 좋은데’ ‘나와는 너무 먼 당신’ 같은 존재로 치부된다. 그래서 공동체도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자기 이해와 욕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수준 높은 공동체가 처한 폐쇄성 극복의 문제처럼, 이러한 가벼운 공동체도 세상의 대안으로 자라나기 위한 과정을 과제로 안고 있다. 느리더라도 이러한 과정이 일어날 때 공동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그래서 영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세상을 변화시켜 주길 바란다. 아무래도 참여는 귀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힘들여 그런 일을 하기보다는 누군가가 그 일을 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에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좋은 사람을 선출해 그들이 그 일을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 안다. 그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세상의 대안이라 이야기하는 공동체를 매개로 한 ‘자립’은 ‘자치’를 통해 가능하다. 자치는 공동체의 기본적 요소이기도 하고, ‘자립’의 삶을 실현시키는 핵심적 수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치의 능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치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자치 역량이 없으면 자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자치의 역량이 강화된다고 하는 것은 참여와 자치의 경험을 통해 훈련되고 내재화되는 것이다. 기타를 치면서 기타를 배우듯이…
그런데, 이 과정은 아무래도 많이 귀찮다. 그리고 이 과정 역시 지속적으로 향상되어야 할 무엇이다. 우리는 그 완벽한 모습을 상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영성 또는 견성(見性)이 필요하다. 이 영성 또는 견성에 대한 정진이 없다면 그간 사회운동이 빠졌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함정이란,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열정이 넘치지만 정작 자신은 변화되지 않는 문제를 말한다. 풀뿌리운동에서 참여자들의 역량과 영향력을 강화한다는 것도 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능력만이 아니라, 영성적 깊이를 더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성 또는 견성의 기본은 나와 이 우주가 또는 나와 신의 존재가 분리된 둘이 아니라 긴밀히 연결된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서구로부터 도입된 존재론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관계론적 세계관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에는 자연생태계와 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인식 등 모든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는 일체가 포함된다. 이를 전일적 세계관이라 칭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지향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영성의 핵심적 내용은 세상(사회)의 변화와 나의 변화, 그리고 내가 속한 집단의 변화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내공의 깊이는 그에 한참 못 미친다.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해대는 나 어쩌면 우리 스스로도 그 내공의 깊이가 천박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래서 영성 또는 견성도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정진, 즉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중요시 한다. 그래서 새로운 대안적 ‘나라’를 만드는 일은 자치를 통한 자립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이를 세상과 긴밀히 관계 맺도록 하는 것에서만 그칠 수 없다. 그 과정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그 과정을 통해 대안적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요즘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다. 내가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자립과 내가 행복하게 소속될 수 있는 공동체는 내 영성의 내공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내공의 정도만큼만, 딱 그만큼만 내가 세상을 대안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풀뿌리운동을 하고 이를 강조하는 것은 그 과정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게 초청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도반(道伴)이라 하던가? 보다 많은 도반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풀뿌리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 세상이 변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