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이땅에 현묘지도가 있으니 곧 풍류라 한다. 가르침의 내력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포함삼교하고 접화군생하니….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사(仙史)란 화랑의 역사를 말합니다. (신라에서는 나중에 화랑을 국선(國仙)이라 불렀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김대문의 <화랑세기>와 같은 책들이 여기에 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동안 학계에서는 위의 최치원 선생의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습니다. 즉 유불선이 들어온 후 그들의 장점을 취합해 ‘풍류’를 만들어 어리석은 민중을 교화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유불선이라는 학문다운 학문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유불선 이외의 사상이나 정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유불선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이러한 해석은 얼핏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중국에서 유불선이 전래되기 전에는 이땅에 문화랄 만한 것이 없었고,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시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벽화를 보면 당시 샤마니즘이 문화적으로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즉 샤마니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에는 그에 상응하는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불선은 오히려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위치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샤마니즘적 세계관이 확고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현상은 백제, 신라,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땅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식의 해석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존의 해석에 의하면 유불선의 장점을 취해 이땅의 현묘지도인 ‘풍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불선의 위치는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문화든지 최번성기를 맞았을 때 그것을 배우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취하는 것이지 이미 사양길로 들어섰을 때는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따라서 퇴락한 유불선의 장점을 취해 이땅의 새로운 풍류문화를 만들었다는 시각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유교를 봅시다. 한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까지 신봉되었지만, 곧 위진남북조 시대(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로 넘어가면서 한족(漢族)들은 북방민족들의 지배를 받아 강남(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내려가게 됩니다. 그와 함께 유교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지고 지식인들은 노장풍의 은둔생활과 술과 시문으로 세상을 한탄하며 지내는 이른바 ‘청담(淸談)’, ‘현담(玄談)’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 시대는 유교사에서 볼 때 가장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애당초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이땅에 전래되었고, 그 후에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말까지 계속되었지요. 때문에 당시 일반백성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당나라의 불교는 엄청난 사원전답을 소유하게 되면서 타락할 대로 타락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새롭게 백성을 교화한다는 생각 또한 맞지 않는 것입니다. 훗날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주자는 “불교 가지고는 새로운 문화를 일으킬 수 없다” 하여 대신 신유학, 즉 주자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도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중국의 신선사상이란 고대 동북아의 샤마니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초기 신선사상의 경전이었던 <태평경>에 고구려의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탔던 오룡거(五龍車)가 나온다든지, 부여의 샤만 등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중국에도 샤마니즘이 있었습니다. 고대 동이족인 은나라가 샤마니즘 국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샤마니즘은 사실상 잠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교는 영혼의 세계와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연히 샤만의 활동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민중신앙은 개인의 불로장생을 비는 기복의 형태로 변화하게 됩니다.그들의 이상이었던 ‘신선’이란 호흡법이나 연단술(鍊丹術) 등을 통해 불로장생의 도를 깨우친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신선이 이상화되면서 일상의 행위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고대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지혜는 사라지고, 다분히 magic화한 기복적 도교 형태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불선에서 장점을 취해 이땅의 현묘지도인 풍류를 만들어 민중을 교화했다는 기존의 해석은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채 억지로 갖다붙인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퇴락해가는 유불선을 취합해 새로운 풍류도를 만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치원 선생이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땅에는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풍류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가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물질의 욕망이 생기면서, 그리고 여기에 중국의 유불선이 덮어씌워지면서 그 아름다운 도가 점점 잊혀지고 말았다고 말이지요.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기에서 풍류에 대한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현묘지도가 유불선의 가르침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치원 선생의 다음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니 이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자연의 법을 어기지 않고 무위적인 삶을 살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침묵을 사랑하니 이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쓰니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도다.”
여기서 우리는 최치원 선생이 말하는 풍류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으니 바로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의 법을 어기지 않고 무위적인 삶을 살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침묵을 사랑하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문화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삶과 문화를 들고 있는 시베리아의 일부 소수민족이나 북미 인디언들의 삶의 내용과 거의 똑같습니다. 북미 인디언 역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며, 자연의 법을 거스르지 않고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모든 생명을 공경하며 침묵을 사랑하는 삶을 살며 늘 선함을 위해 노력하는데, 이것은 위의 최치원 선생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치원 선생이 살았던 9세기 중엽만 해도 이땅의 아름다운 현묘지도, 즉 풍류의 문화가 민중들 속에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최치원 선생이 현묘지도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19세기 중엽에 태동된 동학은 바로 이런 풍류의 아름다운 도(현묘지도)가 민중적 지혜의 형태로 오랫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구한말에 꽃을 피운 거라 할 수 있습니다.
* 다움 카페 <바람이 꽃이 되어> 검은 호수 서정록 님의 글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