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와 ‘바람 흐름 결’ (서정록)

제목: 인간은 무엇인가

저자: 서정록 (재야사학자, <백제금동대향로> 저자)

발표: 2003년 모심과 살림 학교 자료집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오늘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진 데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현장은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은 자칫 공허한 고담준론으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북미 인디언들에게 그것은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자기탐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늘 자연과의 균형과 조화를 염두에 두며 자신을 낮추고, 물질을 서로 나누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시인’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시행착오와 숙고 끝에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를 깨달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지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늘은 먼저 인디언들이 이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없이 오늘의 이 혼란한 세상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북미 인디언들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생명을 갖고 있으며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러한 사고는 우리의 조상들을 포함해 전통시대 샤마니즘 문화권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던 생각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인디언들의 사고에는 좀더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다른 동식물, 그리고 돌멩이 등을 포함한 자연의 존재들은 모두 어머니 대지의 자식들이며, 위대한 신령의 아이들이라고 말합니다. 또 동식물이나 자연의 모든 존재들을 우리의 형제요 친척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우리의 피붙이라는 것이지요. 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은 아이들에게 늘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모든 존재들을, 하다못해 길가의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조차 공경하도록 가르칩니다. 비록 동식물이나 돌멩이, 벌레 등이 그 형태나 생존의 방식에 있어서는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 모두 생명을 갖고 있는 살아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으며, 자신들만의 임무와 역할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라코타족(수우족)의 위대한 주술사였던 검은큰사슴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하찮은 것이라도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것이다.

그 속에는 행복이 있으며,

다른 존재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신성한 힘이 있다.

마치 서로 얼굴을 맞대고 부드럽게 부비는 풀들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백인들에게 무참히 살육당하고 멸시당한 그들이지만, 그 험한 세월 속에서도 이런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기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들이 마음의 칼날을 세우고 백인들과 맞서려고 했다면 지금 우리에게 그들의 귀중한 정신을 전해줄 수 없었겠지요.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역사상 가장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북미 인디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들 중의 하나로 오대호 북서쪽과 남쪽에 거주하는 오지브웨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화와 이야기는 이로쿼이 연합 등 동부 산림지대와 로키산맥 북부지대의 많은 민족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우주는 네 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물질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들의 관계에 대해 오지브웨족 출신의 학자인 바실 존스턴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에는 4개의 질서가 있다. 첫째는 물질의 세계이고, 둘째는 식물의 세계이며, 셋째는 동물의 세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의 세계가 있다. 이 네 개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들이 하나가 되어 우주의 생명과 자연의 전 존재가 만들어졌다. 이 네 세계 중 하나라도 없으면 생명과 존재는 불완전해지며, 우리는 자연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어느 누구도 자기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완전해질 수 없다. 모든 존재는 네 개의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창조적 질서 안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기능과 목적에 충실할 때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네 개의 세계는 시종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동물은 식물에 의존하며, 식물은 그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대지와 태양으로부터 가져온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물질의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이들 네 세계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과 식물없이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존재들이 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균형과 조화가 유지되어야 하며, 그것은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준수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Basil Johnston, Ojibway Heritage, 1976, p.21)

 

우주와 자연은 물질과 식물과 동물과 인간의 네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동물과 식물에 의존하고, 동물은 식물에 의존하며, 다시 식물은 물질세계 – 대지와 태양 – 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동식물과 물질의 존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식물과 동물의 세계에는 자연의 균형의 법칙을 따르기 위한 성향과 본능이 내재해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다행히 사람은 그들에게는 없는 이해력를 갖고 있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으며, 자연의 질서 속에서 그의 위치를 확립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의 내부가 아닌 ‘밖에서’ 안내자를 찾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는 먼저 이 세계가 어떻게 짜여지고 움직이는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는 위대한 신령 키치 마니터우가 의도한 대로 창조의 질서를 경외하는 진실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Basil Johnston, 같은 책, p.21f)

 

한마디로 인간은 동식물과 물질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돌보고 챙길 때에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들과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존스턴의 이러한 주장은 굳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지구생명의 위기는 인류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자연을 지배하려고 한 데서 비롯된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은 그들이 자연의 일부임을, 어머니 대지의 자식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 대지가 없으면, 자연이 없으면 그들 역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지브웨족의 창조신화에 의하면, 위대한 신령 키치 마니터우는 자신의 ‘신명(vision)’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식물과 동물들을 만든 뒤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식물을 창조한 뒤에 키치 마니터우는 동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 각각에게 특별한 힘과 성질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두 다리를 가진 동물, 네 다리를 가진 동물, 날개를 가진 새, 그리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생겨났다.

 

마지막으로 그는 인간을 창조했다. 비록 창조된 순서는 맨나중이었지만 다른 존재들에게 의존하는 면에서는 첫 번째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신체적으로도 가장 연약했다. 대신 키치 마니터우는 인간에게 가장 위대한 선물인 신명, 즉 ‘꿈꾸는 힘’을 주었다.

(Basil Johnston, 같은 책, p.13)

 

인간은 동식물보다 생존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직 동식물에게 의존해서만 연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위대한 신령은 인간에게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신명을 주셨습니다. 신명이란 인간이 생시나 꿈속에서 신이나 다른 동식물, 그밖의 다른 존재들과 대화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말합니다.

 

위대한 신령이 인간에게 신명을 주신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부여한 신성한 임무를 깨닫게 함으로써, 창조를 끝낸 키치 마니터우가 쉬는 동안 자기를 대신하여 이 세상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점을 이로쿼이 연합의 의장이었던 레온 쉐난도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창조주는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볼 때 다른 존재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주는 특별히 그에게 당신이 창조한 다른 존재들을 돌볼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존재들의 지배자가 아닌 안내자 또는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Steve Wall, To Be a Human Being, 2001, p.40)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 대신 자연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점을.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다른 존재들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그들을 공경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기독교의 창조신화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라코타족(수우족)의 추장이며 영적인 지도자였던 고귀한붉은사람(매튜 킹)은 1983년 그들을 찾아간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들에게 우주의 물질과 영성과 초자연적 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신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세 가지 힘을 선물로 주셨네. 물질의 힘, 영적인 힘, 그리고 초자연적인 힘이 그것이지. 물질의 힘은 이 대지가 갖고 있는 선함이지. 영적인 힘은 인간이 갖고 있는 선함이고, 초자연적인 힘은 신과 위대한 신령이 갖고 있는 선함이지.

 

이 세 힘은 모두 따로 떨어져 있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이 힘들을 연결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이야! 우리 인디언들은 기도와 의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이 세 가지 힘을 하나로 연결시키지. 우리가 잠시도 기도와 의례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야.

 

물질은 사람들의 삶을 떠받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물질만으로 이루어진 생명은 살 만한 가치가 없어. 영성이 없는 물질만능의 세계는 저주나 다름없거든!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그 물질을 영성에 봉사하도록 하는 거야.

 

영적인 힘은 신에게 기도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힘을 말해. 이 힘은 무엇이든 좋게, 아름답고 선하게 만드는 힘이지.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힘이야. 이 영적인 힘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임무라고. 영적인 힘이야말로 우리를 단순한 물질덩어리가 아닌 ‘인간’으로 만들어주거든.

 

세 번째 힘은 초자연적인 힘이야. 신이 만든 위대한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강력한 힘이지. 그것은 또한 우리의 기도에 답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힘이기도 하지.

 

당신들은 자신들의 복을 빌거나 힘을 확대하기 위해 그 힘을 사용해서는 안 돼. 그러면 마술이나 요술로 전락하고 말거든. 결국에는 그것이 당신들을 부리고 말지. 그러나 당신들이 영적인 힘을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때는 신이 당신들을 돕기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실 거야.

(Harvey Arden(ed.), Noble Red Man, 1994; Steve Wall & Harvey Arden, Travels in a Stone Canoe, 1998에서)

 

그에 의하면, 이 우주는 크게 물질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 그리고 초자연적인 세계, 즉 신(령)들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간의 임무는 물질의 세계를 기도와 의례를 통해 영성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은 위의 오지브웨족 창조신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인간이 자연과 물질의 세계를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물질을 사람과 동식물 모두에게 유익하도록, 그래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다 같이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써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리고 그 거미집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임무라고 말이지요.

 

따라서 고귀한붉은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우리를 물질이 아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 내 가족과 이웃과 주위의 존재들을 돌보고 챙기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북미 인디언들은 말합니다. 아마도 자기들만큼 늘 진지하게 생각하고 명상하며 사는 이들도 드물 거라고. 그들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마음을 쓰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곧바로 주위의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갖고 산다면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균형과 조화를 유지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바르지 못한 생각을 갖고 행동하면, 그것은 주위의 존재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사는 우주와 자연은 균형과 조화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밖으로 드러내지 않은 마음속의 생각이 주위의 다른 존재들에게 무슨 영향을 끼치랴 싶지만 인디언들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에 대해서 북아메리카의 남서지역 산악지대에서 사는 나바호족은 우리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나바호족이라고 하면 북미 인디언들 중에서도 현재 가장 많은 25만명 정도의 인구를 갖고 있는 민족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들의 언어는 아타파스칸 계통으로 고대 동북아지역의 언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돌멩이나 동식물은 인간과 달리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동물들은 고작 울음소리나 짓는 소리 등 의성어를 사용해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합니다. 식물들은 그나마도 하지 못합니다. 바람이 불 때 가지를 흔들거나 소리를 내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뿐입니다. 돌멩이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색깔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이처럼 바위나 동식물은 그저 제 앞가림이나 하며, 나름대로 자신의 주위의 존재들과 관계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견주어 인간은 말을 할 줄 압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고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바호족에 의하면, 태초에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은 ‘신성한 바람’이라는 신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숨쉴 때면 그 신이 준 바람을 들이쉬고 내놓습니다. 그런데 신성한 바람은 태초에 사람뿐 아니라 동식물, 해와 달, 산과 강, 호수, 심지어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 바람은 각각의 존재의 내부에 들어와서는 영(靈, 주재자)이 되고 밖으로 나와서는 울음소리가 되고, 바람에 스치는 산이 되고, 물결이 이는 호수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들이쉬고 내놓는 숨은 다른 존재들의 숨과 끊임없이 경계를 섞으며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태초에 신성한 바람이 준 생명의 숨결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숨결은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생명이 되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는 말과 노래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생각과 말과 노래는 우리가 내놓는 숨결이 다른 존재들의 숨결과 섞이듯 주위의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도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인간의 생각이나 말과 노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바호족은 인간의 올바른 생각과 말과 노래야말로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태초에 신성한 사람들(신령들)이 우주에 부여한 질서를 본받아 주위의 존재들을 챙기고 돌보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이 우주와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말이지요.

 

나바호족의 모래그림 연구로 유명한 그리핀-피어스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전통적인 나바호인들에게 영성, 건강, 조화, 아름다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건강, 번영, 행복과 평화 등 인생에서 추구할 만한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우주의 모든 부분이 살아있으며 상호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영성적 사고에 바탕한 일상적 삶으로부터 온다.

 

나바호인들은 우주를 가리켜 모든 존재들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유익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전체(all-inclusive whole)’라고 말한다. 인간들, 동물들, 식물들, 그리고 산들은 이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전체, 곧 우주를 구성하는 조화로운 요소들이다. 이 우주에서는 상호성의 원칙에 기초한 질서있는 균형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한다. 이 우주의 균형을 유지하고 모든 존재들을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다.

(Griffin-Peirce, Earth is My Mother, Sky is My Father, 1992, p.29)

 

같은 맥락에서 이로쿼이 연합의 의장이었던 레온 쉐난도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디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고 의례를 행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 지구가 파괴되지 않고 좀더 지속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심지어 북미 인디언들은 아침에 해맞이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아침 해맞이를 합니다. 우리가 해를 위해 기도할 때만 해가 아침에 동녘에서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주와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자연을 지배하고, 동식물들을 지배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북미 인디언들은 오히려 반대로 자연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동식물 또한 우리의 형제요 친척이므로 마땅히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 그러한 마음으로 동식물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북미 인디언들이 바라보는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치는 분명합니다.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주위의 존재들을 공경하고, 그들을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돌보고 챙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돌보는 자(caretaker)’를 뜻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구대륙의 ‘최령자(最靈者)’니 ‘만물의 영장(靈長)’이니 하는 따위의 우쭐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말입니다. 홍익인간이란 말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언뜻 보면 이 말은 우리 인간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환웅이 이 세상에 내려왔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잘 알려진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