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 협동운동의 ‘비밀’
– ‘생-소-하나’ 원칙과 새로운 사회・경제 –
글 주요섭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한살림은 협동조합 맞나요?” 한국사회에 협동조합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한살림도 많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립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형 협동운동의 개척자”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협동조합으로써의 정체성(?)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분명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 법인인데도 말입니다. 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인데 뭔가 달라 보이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맞습니다. 한살림은 유별난 협동조합입니다. 1988년 ‘한살림공동체 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했고, 1993년 한국 최초로 ‘생활협동조합’이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 소비자는 소비자끼리 생산자는 생산자끼리 결집하는 전통적인 협동조합의 틀을 넘어서려 했습니다. 그 특별함의 바탕엔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라는 대원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 한살림 협동운동의 대원칙
한살림 협동운동의 특징을 딱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입니다(앞으로는 간략하게 ‘생-소-하나’라고 쓰겠습니다.). 한살림이란 말 자체가 농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가 본래 ‘한살림’, 즉 나눌 수 없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한살림을 시작하면서 쓴 故박재일 회장님의 편지가 절절합니다.
“원래 생산과 소비, 생산자와 소비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요, 서로를 필요로 하고 돕는 사이인데, 현실은 서로 갈등하는 사회가 되어버렸어요. (중략) 땅과 사람, 물건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가 갈라지고 못 믿는 사이가 되는 삶이 살림의 삶일까요, 죽임의 삶일까요? 농산물 값이 내려가면 농민은 울고 소비자는 좋아하고, 농산물 값이 올라가면 소비자는 울고 농민은 좋아합니다. 이처럼 다른 이의 아픔이 나의 기쁨이 되는 삶이 옳은 삶일까요?” (「한살림을 시작하면서」, 1987)
물론,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갈라진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시 만나야 합니다. 박재일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은 둘로 나눠진 대립 관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생산과 소비가 하나'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2003)
한살림운동 초기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대구를 지키며 땅의 생명사상을 실천하고 계시는 천규석 이사장님의 말씀대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생산자가 곧 소비자가 되는 생산·소비가 통일된 세상은 한살림의 이상이자 인류의 이상”이었습니다(「한살림공동체란?」, 1992).
이렇듯 생-소-하나는 한살림 협동운동의 절대원칙입니다. ‘하나됨’의 바탕에는 ‘모심’의 생명사상이 깔려있습니다만, 동시에 한살림 협동운동의 방향과 전략, 조직형태에 대한 탐색과 고민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생-소-하나의 명제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전략이 ‘직거래’이고, 소비자공동체의 조직형태가 ‘생활협동조합’이었던 것입니다.(생산자공동체의 조직형태는 다양합니다.)
직거래를 넘어서1: 삶과 사회를 바꾸는 ‘생-소-하나’
그런데 생-소-하나가 곧 직거래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살림을 유기농산물 직거래 업체로 생각하고 한살림의 소비자 조합원과 생산자 회원들도 대체로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직거래는 유력한 전략이긴 하지만,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입니다.
“흔히 말하는 직거래를 생각한 것인데,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개념이 정확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직거래라고 했을 때 그것도 결국은 ‘사고판다’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인데, 제가 생각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딱 나눠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전체와 인간관계를 바꿔내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그렇습니다. 직거래가 생-소-하나를 실현하는 핵심전략이기는 하지만, 단지 유통단계를 줄여 농산물 가격을 떨어뜨리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확하게 한살림운동의 종착점은 ‘삶과 사회(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입니다. 한살림에서 생활양식이란 단순히 소비만이 아닙니다. 생산-교환-소비-재생으로 순환하는 경제생활 전체가 넓은 의미의 생활양식입니다.(여기서 ‘재생’은 ‘폐기’의 반대말입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폐기로 끝나면서 생태순환이 단절됩니다만, 유기농업의 순환에서 보이듯이 ‘재생’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생-소-하나는 우리의 소비생활을 바꿉니다. 다시 말해 ‘소비양식’을 바꿉니다. 소비를 생산과 무관하게 따로 생각하게 되면, 값싸게 구입해 많이 쓰고 많이 버리는 게 최고가 됩니다. 쓰레기가 어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생산을 어떻게 하든 무관합니다. 농약을 치고 화학비료를 뿌려 땅을 죽이고, 화석연료를 태워 지구를 뜨겁게 덥혀도 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쓰고 버리는 일회용 생활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한살림에서 소비는 땅과 사람과 온 생명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나만 잘 먹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자와 함께 이웃과 함께 협동적 소비로 나아갑니다.
생-소-하나는 소비양식뿐 아니라 생산양식도 바꿉니다. 돈 벌기 위한 생산이 아니라, 조합원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생산이 됩니다. 많이 팔기 위해서 생산하려고 하면 농약과 화학비료를 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비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농사를 짓습니다. 유기농업이란 관계를 생각하는 농업입니다. 땅과의 관계, 이웃 농민과의 관계, 소비자와 관계가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생명농업, 협동적 농업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소유양식까지도 바뀝니다. 생산자가 함께 소유하는 공동소유 혹은 협동적 소유, 나아가 소비자까지 출자에 참여한 생산자-소비자 공동소유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생-소-하나는 도시와 농촌을 이어줍니다. 산업화과정에서 도시는 선망이며 절대선이었습니다. 사람도 자원도 정치도 예술도 모두 도시로 집중되었습니다. 농촌은 그저 도시에 먹을거리와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만 하면 끝이었습니다. 도시적 삶은 우월하고 농촌의 삶은 열등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릅니다. 한살림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도농교류와 농사체험을 통해 농촌과 농업을 새로 배웁니다. 도시적 삶과 농촌적 삶, 유목적 삶과 정착적 삶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땅과 분리된 개인의 삶도 온전히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생-소-하나는 인간관계를 바꿉니다.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라 주고받는 관계, 즉 도시에 나간 아이들에게 쌀과 김치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농촌에 계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듯 사고팔기가 아닌 주고받기의 마음과 관계가 녹아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의 공동체, 한살림이 되었습니다.(이는 뒤에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의 극복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렇습니다. 생-소-하나는 우리의 삶을 바꾸고 인간관계를 바꾸었습니다. 우리의 소비생활과 생산방법을 바꾸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나아가, 하나로 연결된 생명세계의 마음을 지금 여기서 실현하였습니다.
직거래를 넘어서2: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드는 생-소-하나
“현재 이러한 활동은 농촌과 도시의 직거래운동 차원을 넘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와 만남, 생산과 소비의 통일을 지향하여 상품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또한 생산자인 농민들은 생명의 농업인 유기농업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으며, 주부들이 중심인 소비자들은 유기농산물을 사먹는데 그치지 않고 환경문제 교육문제 등 우리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죽임의 질서를 극복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생활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어디서 나온 이야기일까요? 최근에 쓰여진 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은 1990년에 출판된 무크지 『한살림』에 실린 “새로운 삶의 이해와 생활협동운동”이라는 주제의 좌담회 앞머리 글입니다(박재일 회장님과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 이순로 이사장님, 한살림생산자협의회 故김영원 회장님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참고로 부제는 “생활협동운동, 특히 유기농업과 소비자운동의 연대를 중심으로”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직거래를 넘어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직거래 자체도 어려운데 자꾸 넘자고 합니다. ‘직거래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자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넘어서, 무엇을 향해서 가야 할까요?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라면, 새로운 경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김영원 회장님은 좌담에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직거래와 협동조합을 통해 시장경쟁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나아가 한살림 공동체운동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의 한계와 대립을 극복하는 제3의 방향으로”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십니다(「유기농업은 생명문화의 기본」, 1998).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동시적 극복’, 이는 <한살림선언>에서도 강조되고 있듯이 한살림운동의 사회적 지향점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직거래는 직거래이되, ‘사고파는 직거래’가 아닌 ‘주고받는 직거래’입니다. 즉 생산자와 소비가 서로를 울리는 자본주의식 ‘적대적 교환’이 아니라 ‘호혜적 교환’입니다. 호혜란 서로에게 동시에 이익이 되는 주고받기입니다. 증여와 답례의 관계를 말하며,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선물(gift)경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고파는 관계가 아닌 주고받기의 관계는, 한살림을 시작하면서 서로 다짐했던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말 안에 오롯이 담겨져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생명과 생활은 사고팔 수 없다는 것을.
그 구체적인 방법이 소비자와 생산자의 약정에 이루어지는 ‘계획생산 책임소비’이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협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협의가격’, 혹은 ‘호혜가격’입니다. 한살림 매장에서는 감자가 동이 나도 일반시장에서 매입을 해서 소비자 조합원에게 공급하는 일은 없습니다. 약정된 생산량이 소비되지 않으면 이용촉진을 통해 소비를 책임집니다. 2008년 농업용수 문제로 친환경농산물 인증이 취소된 아산·당진쌀 8,800가마를 전량 ‘책임소비’했던 한살림의 역사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한살림의 직거래는 매장에서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내용은 매매가 아닙니다. ‘새로운 시장’의 창조입니다. 시장은 원래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시장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경제형태 중 하나였습니다. 때문에 시장을 없앤다는 것은 오만이거나 환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반증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살림의 새로운 경제질서란 시장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가들이 지배하고 또 주인공 역할을 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면,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공산당이 지배자가 되고 이들이 육성한 공기업 등이 주인공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둘 다 시장의 지배자는 다르지만, 그 작동원리는 돈벌이, 즉 이윤동기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장이란 무엇일까요? 이름하여 ‘호혜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격과 영혼마저도 돈벌이의 대상, 즉 상품으로 만들어 사고파는 ‘상품시장’이 아니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호혜시장 말입니다. 시장 본래의 기능, 즉 필요한 것을 주고받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시장이 그것입니다. 한살림매장과 벼룩시장과 로컬푸드장터가 바로 호혜시장입니다. 나아가 교환의 매개가 되는 화폐나 화폐대체물을 스스로 만들어 운영하는 지역통화는 호혜시장의 미래일 수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온라인 중고품장터나 개인 간 금융(p2p lending)도 호혜시장의 예가 됩니다. 35만여 세대의 소비자와 2천여 세대의 생산자가 함께 참여하여 연간 한국은행권으로 2,500억 원어치의 물품을 주고받는 한살림은 한국에서 가장 큰 호혜시장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호혜시장의 구조를 호혜서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호혜서클, 혹은 호혜시장이 지역과 전국을 아울러 네트워크 하거나, 보다 큰 시장(플랫폼)을 열면 정말 자본주의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돈벌이경제가 아닌 살림살이경제 시스템, 이를테면 ‘호혜주의 시장경제’ 말입니다(‘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빗대어서).
한살림운동의 목표는 다른 유기농산물판매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한살림운동이 진정 열망하는 것은 대안적 시장의 창출과 확산을 통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질적으로 변혁하는 것입니다. 오염된 강물은 깨끗한 물로써만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살림운동의 선배님들은 소비자공동체와 생산자공동체를 조직하고 이들이 자율적으로 호혜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꿈꾸었습니다. 한살림 공동체는 국가와 시장, 정치와 경제를 넘어서 ‘삶/생명(life)’ 그 자체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운동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인격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호혜시스템은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시스템과 국가가 좌우하는 계획시스템을 동시에 넘어서는 한살림운동의 시스템적 대안인 것입니다.
생-소-하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주인공이 되는 하나됨을 위하여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은 일찍이 “한살림 운동이란 모두가 하나 되자는 운동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고 “조합원이 한울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생산과 소비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뒤섞여서 각각의 독특한 개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생산자는 생산자로,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존재를 드높이는 데 있습니다. ‘자기소멸적인 하나됨’이 아닙니다. 나를 죽여 대의를 받드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하나됨이 아니라, 나를 살려 새로운 세상을 여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의 하나됨입니다. 모두가 똑같아지고 또 서로를 꽁꽁 묶어놓은 대동단결(大同團結)의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서로 어울리되 똑같지 않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이면서 여럿이면서 동시에 연결된 전체이기도 한살림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더 큰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참 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생산자는 생산자대로 소비자는 소비자대로 자기 주체성을 높여야 합니다. 생협 조합원으로써의 조합원 주체성, 생산자공동체 회원으로써의 회원 주체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생산자는 생산자 조직 안에서, 소비자는 소비자 조직 안에서 각각의 지역과 개인이 우주의 꽃 한 송이로써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얘기하셨던 “나는 미처 몰랐네 네가 나였다”는 말씀은 ‘나 없는 너’가 아니라,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너”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다시, 한살림 협동운동의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어떻게 하면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를 잘 계승하고 또 발전시킬 수 있을까? 도시의 마을모임과 농촌의 생산자공동체가 진정한 한살림의 기초조직(기초공동체)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소비자 주체성과 생산자 주체성을 높일 수 있을까? 살아있는 생산자 공동체와 소비자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직형태가 좋을까?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는 물류센터와 매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도시와 농촌, 생산자와 소비자의 교류의 질적인 변화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생-소-하나의 정신과 호혜시장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 나아가 ‘호혜적 시장경제(약칭 호혜경제)’로의 체제전환을 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끝)
※참고문헌: 여기서 인용된 글의 대부분은 한살림 20년 기념자료집 『햇살과 바람, 그리고 정직한 땀의 기록』에 수록되어 있으며, 무크지 『한살림』의 좌담 내용은 『생명운동자료모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살림자료곳간>(archive.hansalim.or.kr)에 가면 찾아볼 수 있으며, 출판물은 모심과살림연구소에 문의하시면 안내해드립니다.
※뱀발: 그런데 사실 생-소-하나만으로 한살림 협동운동을 설명하기엔 약간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비밀이란 원래 잘 보이지 않는 법, 한살림의 진짜 비밀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전략’보다 오묘하고 ‘스토리’보다 심오한, 심금을 움직이는 절절한 그 무엇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렇습니다. ‘마음’입니다. 다음 기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울고 웃는 마음,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마음, 그리고 마음 깊은 곳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연결된 모심의 마음. 다시 말해, 한살림 마음.
※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정세와 동향 <모심의 눈 살림의 길> 제8호에 실린 글입니다.